여우와 여우 사이에 낀 여우
전편: https://brunch.co.kr/@blueingorange/117
우리 회사는 UX 컨설팅 회사이니만큼, UX 관련된 일을 한다. 나는 UX 에이전시라 하면 UI 디자인 팀이 가장 대우가 좋고 뭔가 휘황찬란(?)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기획과 리서치 팀이 상당히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좌지우지 했으며, 디자인까지 따로 하지 않는 프로젝트도 꽤 많았다. 작은 회사이다보니 나도 인력 돌려막기 되는 건 아닌가, 혹시라도 나한테 디자인을 시키면 어떡하지에 대한 걱정이 있었는데, 일단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UX 관련된 일은 매우 많다. 와이어프레임 그리기, Flow 짜기, 유저 리서치하기, IA 짜기, 데이터 분석해서 보고서 작성, 데스크 리서치, 기능과 정책 회의, 디자인, 개발까지. 내가 취준을 하면서 진행했던 대부분의 일을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류의 일도 있었다. 이는 다음 화에 언급할 예정이다) 내가 취준을 하면서 공부한 것과 실무의 차이는 의외로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다. 내가 항상 과하게 상상하고 과하게 기대하고 과하게 리스크를 대비해서 그런 걸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나의 첫 회사생활은 매우 스무스하게 흘러갔다.
그런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도록 피드백을 주고 돕는 상사는 두 명. 팀장 G와, 내 직속 사수 C.
C: 취준할 땐 주로 어떤 거 공부했어요? 인터뷰는 해보셨어요?
나: 네, UT도 사이드 프로젝트로 직접 진행해봤습니다. 그리고 Flow도 짜보고, 통계도 쪼끔은 할 줄 알아요.
C: 아 뭐야~ 다 이미 해보셨네. 그럼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내가 회사에 들어와서 가장 많이, 가장 물리적으로 가깝게 지낸 사람은 당연히 C다. 같은 팀원인 B와도 조금 가까워지긴 했지만 B는 다른 일을 하느라 부딪힐 일이 거의 없어서 보통은 C랑 둘이서 진행했다. 예를 들면...
C: 혹시 이 상세화면에 이 리뷰 정보가 들어갈 이유가 있나요?
나: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정보인데.
C: 음... 이 화면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미 홈 화면에서 보고 들어왔을 거니까요.
나: 그걸 다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을까요? 다시 그 정보를 확인하려면 페이지를 나가야 하잖아요.
C: 글쎄요, 또 확인을 하려고 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여담으로 이런 대화는 한두번 일어난 게 아니라 매번 매일 맨날맨날 나와 C 사이에서 일어난 '논의'이다. 잘 보면 나도 그렇고, C도 그렇고 가설만으로 논의를 하는 게 보이시는가? 이게 UX의 현실이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를 구현해서 테스트를 해서 유저의 옆에 투명망토를 쓰고 찰싹 달라붙어서 모든 행동을 관찰해 그걸 절대 까먹지 않기'가 불가능한 이상 현실의 모든 UX 논의는 저런 식으로 굴러간다. 냉정하게 말해서 경험론 VS 경험론이다.
나: 뭐가 문제죠? 화면을 그렇게 많이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태그 정도 사이즈인데요.
C: 정보가 중복이 되잖아요.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전 잘 모르겠네요. 좀 지저분하기도 하고.
나: 중복이 그렇게 문제가 되나요? 변수를 줄이는 건데요. 여기저기 강조해두는 것도 아니고요.
저기서 내가 '아뇨, 별로 안 지저분한데요'라고 말하는 순간 논의도 내 회사생활도 끝장이다. 사람의 눈은 다 다르다. 뭐를 예쁘다 생각하고 뭐를 지저분하다 생각하는지는 모든 사람들의 관점이 다 다르다. 나와 C는 백그라운드가 너무 다르다 보니 관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관점싸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해줄 객관적인 사용자 데이터가 많지는 않아서, 의미없는 미학과 경험론 싸움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데이터가 있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다. 데이터는 100가지 싸움 중 50가지의 싸움을 없애주고, 또 새로운 100가지의 싸움 트리거를 가져다준다.
'사용자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정보는 리뷰 정보다.' 라는 데이터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 데이터를 어떻게 넣을까? 중요한 거니까 왕 크게 넣어? 중요한 거니까 여기저기 난무해? 중요한 거라고 해도 일회용이니 중복은 필요없어? 그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데이터에서 결과를 분석하는 건 결국은 직관의 영역이 되는데, 이 직관에 대한 근거가 되는 건 논리와 경험이고, 당연히 논리보다는 경험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우리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시장에서 프로덕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경험(경력)이 중요하다. 일단 경험 데이터가 있으면 논의를 끝내고 밀고 나갈 수 있다. 그게 정답이 아니더라도.
아무리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데이터는 모든 논의를 해결해주는 마법의 무기가 아니다. 그냥 칼이다. 덩그러니 책상에 놓여있는 낡은 칼이다. 그 칼을 누가 먼저 빼앗아 쥐고 휘두르느냐, 그 칼을 누가 더 날카롭게 갈아내느냐, 그 칼을 누가 더 능숙하게 휘두르느냐, 그 칼을 누가 먼저 발견하느냐가 중요하다. 먼저 칼을 쥐고 휘두르는 게 나중에 칼을 빼앗는 것보다 훨씬 쉽지 않은가. 쉽게 말하면 선빵필승이다. 칼을 쥔 사람의 판단에 따라서 칼이 휘둘러지는 방향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리고 그 칼을 빼앗기지 않게 지키는 능력도 중요하다. 적이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게 하는 오오라가 필요한데, 그걸 현실의 용어로 바꿔 말하면... '권위'다.
C: A씨 디자인은 좀 낯서네요. 저는 이렇게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다닌 회사에서도 다 그랬고요.
나: ......
나는 그 말에 품은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나는 신입이고, C는 대기업 출신 경력자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눈치채셨을까?
나는 인지심리학 전공자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사람들이 보는 세상은 태어나서부터 각각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거는 성격 이전의 유전자와 관습 등으로 형성되는 직관의 영역이다. 논리는 결국 직관에게 패배하기 마련이며, 나는 사실 그리 논리적이지도 않다. 논리적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나도 논리보다는 직관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고, 나 자신이 그걸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그래서 그냥 설득할 생각을 그만뒀다. 냉정하게 보면 나 자신도 '제 눈엔 이게 예쁜데요'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아니 누가 봐도 당연히 이게 낫잖아? 눈깔이 삐었어?'를 상대방에게 말로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근본적인 시야 차이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C에게는 그 논리싸움 자체를 없애버릴, 시야 차이가 아니라 실력 차이로 덮어버릴 큰 무기 2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대기업 출신이라는 C의 백그라운드와, 나의 자기의심력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최고의 재능 중 하나가 의심력이다.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의심한다)
나는 기세가 그리 오래 가지 않고 한두번 반박당하면 그냥 입을 다물고는 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내 의견이 틀렸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논쟁은 C의 승리로 끝났다. 나는 그날 후로 나의 논리 대신 새로운 근거가 되어줄, 다른 회사의 프로덕트 사례를 가져와서 보여주는 스킬을 배웠다. 다른 회사 서비스 감상 시간만 되었을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서로 다른 마음을 품은 채 회사 생활이 흘러갔다. 나와 C는 그럼에도 친했다. 우리는 완벽하게 화목했고, 서로를 보완해주는 사이였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리고... 팀장 G. 프로젝트 회의는 보통은 회의실에서 나와 C, B, G 네 명이 앉아있고 C와 G가 회의를 주도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작은 회사다 보니 자유롭게 의견을 얘기하고 수평적으로 회의가 흘러가는 경우가 많았다. G 또한 팀원들 하나 하나의 의견을 콕 집어서 물어보거나 퀴즈를 던지거나(?) 하는 등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게 하는 상사였다. 그래서 나도 나의 의견을 C를 거쳐서가 아니라, 팀장에게 직접적으로 얘기하고 논의할 기회도 꽤 있었다.
G: 이런 프로젝트를 하려면 먼저 우리가 사용자가 되어봐야 해요. 우린 UX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책상에 앉아서 따닥따닥 피그마 두드리는 게 아니라, 직접 나가서 체험을 해보고. 사용자도 직접 염탐도 해보고. 직접 움직여서 사용자가 된 것처럼 그 맥락을 체험해봐야죠.
G는 팀장치고는 상당히 젊은 사람이었고(C도 마찬가지) 그래서 의사소통하기가 편했다. C와 G는 뭔가 사교적이고 여행이나 여러 활동을 하는 걸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이란 점이 비슷했고, 사회생활도 많이 한 짬밥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후임(나와 B) 놀리는 걸 좋아하는 개구쟁이 스타일이라는 점이 비슷했다. 그런 둘이 내 상사였기에 회사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되게 뭐랄까, 진지함이 별로 없었다. 나도 진지하고 딱딱한 환경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분위기가 좋기는 했다.
다만, C와 G에게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G: 우선은 해봐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C: 어... 그러니까 어떤 걸...
G: 일단 대충 딱딱딱 줄기만 잡아두고, 구체적인 건 나중에 채우면 되니까. 요약본을 먼저 만든다고 생각해요.
C: 구체적인 걸 안 했는데 요약을 어떻게... 하죠?
G는 내가 볼 때 머리가 꽤 비상한 여우 타입이었다. 배운 지식이 많은 타입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쏘다니며 많은 경험을 한 현장자 스타일이었다.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부하들이 알아서 생각해서 연구를 해오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예쁜 것보다는 내용과 의미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고, 그 점에서 나는 G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말이든 행동이든 속도가 매우 빠르고, 겉보기에는 매우 날림으로 일을 하는 걸로 보인다. 겉보기뿐만이 뭐 아닐 수는 있는데...
반대로 C는 대기업에서 왔다 온만큼 성실했으며, 구체적인 지시를 좋아했다. 디자이너 출신이기도 해서, 나랑 일을 할 때도 내용 그 자체보다는 어떻게 깔끔하게 보일지, 세세한 줄간격 같은 디테일한 부분에 고집을 부리는 면이 심심찮게 보였다. 하나의 완성도를 전부 끝마치기 전까지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 부류의 사람. 시간이 항상 부족했고, 야근은 기본에 점심시간에도 일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G는 좋게 말하면 자유로운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뜬구름 잡는 사람이었다. C는 이거를 '팀장이 당연히 줘야 하는 가이드를 주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나는 뭔가 신기했다. 대기업에서 몇년을 일하고 왔다던 C의 경력 정도면 가이드가 애초에 필요없을 것 같은데, 대기업 중에서도 상당히 보수적인 곳에서 구르고 왔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C는 되게 편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인상에 비해 일하는 스타일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게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여우처럼.
C는 지시가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지시가 오기 전에 어떤 지시가 올지 생각해서 조금씩 미리 해두었다. 나와 C, 둘 중 어떤 타입이 옳은 타입의 부하인지는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옳다고 혼자 생각은 하고 있지만.
G, 이 사람에 대해 오해하실까봐 덧붙이자면 G는 정보를 마냥 안 주는 방치꾼이 아니다. 다만 C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주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보통 이런 식.
G: 그러니까 이거를 하는 우리 의도는 이렇고, 히스토리를 좀 알려주자면 이런 목표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이 일의 의미는 이렇고, 중간중간에도 그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었죠. 이해가 좀 되나요?
G: 어떤 결과물이 나와야 하냐면, 제가 찾아봤던 게 있는데 여기 이 사례를 한번 보세요. 이거는 우리 꺼랑 이런 의미에서 맥락이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참고차. 자 이런 느낌... 이렇게. (갤러리 보듯이 감상 중)
G: 자 이제 할 수 있겠죠?
C: ??????
그리고 나는...
아니 이렇게 맥락과 목표를 핵심만 딱딱 알려주고 레퍼런스까지 직접 찾아주는데 심지어 방법은 자유라고? 이런 미친 새끼, 사랑해요♡
C: 우리 팀장 무능한 것 같지 않아요?
B: 맞아요.
나: ??????
나만 빼고 전부 C의 말에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