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 화목해요
전편: https://brunch.co.kr/@blueingorange/118
우리 회사의 팀 및 부서 구조는 대충 이렇다. 기획 & 리서치 부서, UI 디자인 부서, 그래픽 디자인 부서, 그 외에도 영상, 개발 등 나는 잘 모르는 여러 팀이 있지만 일단 내가 아는 건 우리 기획 & 리서치 부서에 있는 두 팀뿐이다. 편의상 1팀, 2팀으로 서술.
[1팀]
A(나) : 이제 막 입사한 빌빌거리는 신입. 비전공자. 또잉.
B : 내 옆자리 팀원. 나보다 연차가 많지만 잡무 담당이라 변변찮은 프로젝트 경험 없음. 내성적임.
C : 대기업 출신 중간관리직 사수. 사람 좋고 친절한 귀염둥이. 1팀의 PL로 나와 B의 직속 리더.
[2팀]
D: 나랑 거의 동시기에 입사한 신입. 다만 나와 다르게 전공자에 대학원 출신. 얘기해본 적은 없으나 당차고 일을 잘하게 생긴 관상(?)이었다.
E: B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팀원. UX 프로젝트 경험은 조금 있어 보였으며, 나와 비슷한 나이대인데 MZ답지 않은 꽉 막힌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팀원들이 E를 우리 부서의 외향적인 인싸라고 소개해줬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F: 일단 2팀의 PL을 맡고 있는 중간관리직. 나와 안면은 없어서 잘 모르긴 하지만... PL인데 UX 프로젝트 경험이 별로 없어보였고, 우리 팀의 B와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그래서 F가 아니라 D가 실질적으로 프로젝트를 리드하는 포지션인 것 같았다...
G: 팀장. 사람 좋아보이고 친절해보이는 20년차. 1팀/2팀을 총괄하는 PM. 사실상 내 글에 나오는 유일한 팀장님이 될 것이다.
우리 부서가 두 팀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유는 팀마다 맡는 UX 프로젝트 성격이 달라서인 것 같다(직접 설명을 들은 건 아니고). 1팀은 C를 주축으로 선행 프로젝트를 주로 맡고 있었고, 2팀은 유지보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다만 팀 구조는 상당히 가변적인 듯했다. 당장 내가 입사하기 전에도 팀이 몇번씩 바뀌었다고 들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직무에 따라 팀을 이동할 수 있다고 들었고 그건 꽤 좋은 것 같다. 중증 UX 덕후인 나에겐 별 의미가 없긴 했지만...
또 우리 부서의 특징이 있다면, 대부분의 팀원들이 1~3년차 사이로 전반적으로 연차가 낮았고 회사에 있었던 경력도 짧은 편이었다. 가장 경력이 많은 C도 우리 회사에 온 지 얼마 안돼서 이제 1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시니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고연차 직원은 사실상 G 팀장님 한 명. 이게 IT 중소기업들의 보편적인 현실. 대기업 컨설턴트 출신 C는 어딜 봐도 혼자서 프로젝트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짬밥이 있는 리더였고, 2팀의 PL인 F는 전혀 그래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점이 상당히 묘했다.
마지막으로 G. 이 사람 관련해서도 할 말이 되게 많다. G는 우리 1팀의 팀장이지만, 2팀의 팀장은 공석이기 때문에 사실상 대표님이 그 역할을 대신 하고 있어서 실제로 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다. 평소엔 우리 팀에 붙어있다가, 2팀이 대표님께 피드백을 빙자한 괴롭힘을 당하다가 대표님이 '하 G야 이쪽으로 와봐'라고 팀장님께 손짓하면 2팀으로 옮겨가 집중케어를 (어쩔 수 없이) 담당하는 역할이다. 그리고 영영 우리 팀에 돌아오시지 않는다.
G 이 사람이 사실상 모든 UX 팀을 총괄하는 사람이며, 내가 면접을 볼 때 특유의 -_- 표정을 일관성 있게 띠고 계셨던 그분이 맞다. (브런치북 '말 못하던 아이 기획자 되기까지' 25-26편) 대표님과 다르게 굵직한 질문만 소수 몇개 던졌던 그 특징 그대로, 상당히 방임주의 스타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말빨 좋고 머리 좋고 실력도 있는 스타일이다. 다음 화에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심하게 개성이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는 좋은 쪽으로, 다른 팀원들에게는.....
아무튼 나는 C의 지시를 받으며 첫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반년짜리였고, 사용자 조사만 3회를 하고 워크숍에 출장까지 여러 번 존재하는 꽤 큰 선행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는 매우 템포가 빨랐고,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프로덕트의 방향성을 정의하는 것이라 나는 매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에 임했다.
신입이지만 나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아마도 우리 회사가 그리 여유롭지 않고 인력도 부족한 회사라서 그런 거겠지만, 나에게는 어찌 되었든 운이 좋은 일이었다. 같은 팀원인 B는 이와중에 가엾게도 다른 잡무성 프로젝트에 끌려가서 시간을 거의 내지 못했고, 사실상 이 프로젝트는 나와 C가 둘이서 진행하게 되었다.
G: 이번 프로젝트가 좀 어렵기는 해요. 저희 회사가 여태 받아왔던 것보다 규모도 좀 큰 편이죠. 그래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일단 끝내기만 하면 성공이죠.
C: 네, 그래도 팀장님이 계셔서 다행이네요! 사실 이 회사가 팀장님 덕에 버티는 거죠... 팀장님은 완전 능력자시잖아요? 대표님은 어휴... 살짝...
G: (웃음) 무슨 엄마도 아니고 좀 깐깐하시죠? A 씨는 어때요?
C: 저희 회사 그래도 자유롭지 않아요? (웃음)
나: 넵 좋습니다
G: 아 너무 자유롭게 풀어줬나~?
G 팀장은 저런 농담을 해도 본인이 가장 자유로우신 분이다. G에 대해 내가 느꼈던 첫인상은 '오 뭔지 알 수가 없음'이라는 느낌이었다. 딱이었다. 어떤 심각한 일이라도 매우 가볍게 들리게끔 말을 지껄이시는 게 특기이시며, 정작 쓰잘데기 없는 얘기를 할 땐 진지한 얼굴로 개소리를 하는데 그 개소리가 개소리인지 한참 뒤에 가서 '앗씨 나 속은 거였네'라고 깨닫게 만든다. 참 염병 유쾌하신 분이었으며, 내 취향이다.
어쨌든 나름 화기애애했다. 공공의 적인 대표님(마이크로매니징의 정수이시다)을 까면서 잦은 외근과 출장, 야근을 견뎌냈다. 새로 들어와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두 여우들이 놀리거나 하면서. (출장지에서 숙소를 못 구하면 어쩔 수 없이 근처에서라도 자야 하니 캠핑카를 빌려오라고 했던 당신...)
C: 에휴, 들어오자마자 야근에 외근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저희 회사가 일이 많기는 해요. 음, 정확히는 뭐라고 할까...
C: 쓸데없는 일이 많죠. 제가 대기업에 있었을 때랑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 스케일이 사실 그렇게 큰 건 아닌데... 뭐랄까?
C: 응, 인력 부족이죠.
인력의 수가 부족하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C가 말한 인력의 얘기는 '프로젝트에 가용 가능한 인력'이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예를 들면 다른 일을 하느라 같은 팀인데도 전혀 참여를 못하고 있는 B라던가.
그리고 UX에 대해 배운 사람들 자체가 부서에 얼마 없어서 회사 수준이 떨어진다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C: 그래도 A 씨는 전공자는 아니어도 전문적으로 배우고 오신 거잖아요? 그래서 대표님이 저한테도 말씀해주셨어요.
나: 어떤 걸요?
C: 저희 회사에 UX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UX 에이전시인데... 사람들이 다 퇴사하고 나가가지고 저나 팀장님 말고는 UX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아, 그리고 같이 들어온 D씨까지 해서 세 명. A씨까지 하면 네 명.
나: 저는 사실 독학 같은 거라서요, UX 대학원도 딱히 안 다녔고...
C: 어휴, 심리학 전공이시면 사실상 UX 전공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니까 되게 잘 아시는 것 같던데요. 그래서 대표님이 A씨를 경력이 없다고 해도 바로 프로젝트에 투입하신 거예요.
회사 내에 약간의...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가 과하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 UX 인력과 비UX 인력끼리. 왜냐면 대표님은 비UX 인력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물론 우리끼리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C는 우리 부서 사람들과 두루두루 전부 다 친했다. 그래서 나는 C가 우리 회사에 온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걸 듣고 매우 놀랐다. 하지만 그래도 큰 물에서 놀다 온 사람이라 그런지, 자기 PR하는 능력도 매우 좋고 깔 건 까고 넘어가는... 마냥 다 같이 다 같이 으쌰으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게 당연하겠지.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C는 나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다. 얼마 없는 UX 인력이라 그런지. 회사 사정을 듣고 나니 좀 이해가 됐다. 그것뿐만 아니라 내 기를 살려주려는 그런 뉘앙스가 보였다고 할까... 일단 칭찬과 응원을 던지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칭찬 받는 거엔 익숙하지 않고, 또 좋아하지도 않아서 C가 나를 띄워줄 때면 적당히 웃어넘기고는 했다.
C는 상당히 수평적인 사람이라 내가 의견을 내거나 일을 맡겠다고 하면 자신감을 가지라며 마냥 환하게 웃고는 날 전혀 고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점점 용기를 얻어 의견을 얘기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몇 가지 과제를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쨌든 신입은 뭐라도 해서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 그게 내 일이라 인정받지 못해도, 사회적 인정은 좀 나중에 챙겨도 된다. 우선 실력과 자신감을 쌓는 게 먼저.
그래서 나는 내 사수 C가 내가 한 결과물에 피드백 하나 해주지 않고 내용에 손조차 대지 않아도, C가 내 기를 살려주려는 의도이니 그러녀니 생각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새 어떤 피드백도 가르침도 없이 나 혼자서 수십장짜리 보고서를 연속으로 쳐내게 되었다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C가 내 결과물에서 내 이름을 지우고 혼자 G에게 보고하러 간다고 해도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빌런이 되기까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