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보고 2: 와이어프레임과 문서와 붉은 빛의 나

자기확신.

by 블루잉오렌지



전편: https://brunch.co.kr/@blueingorange/133



중간 보고서는 아예 나 혼자 하게 되었고, B는 빠졌고(곧 또 돌아올 것이다), C는 계속 와이어프레임과 Flow 작업에 집중한다. 그렇게 우리의 일은 완벽하게 다른 방향으로 분화되었다.


이게 옳냐는 생각은 항상 했다. 나는 그때 수습 기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피드백이 거의 없는 채 혼자서 일을 했다. (왜 피드백이 없었느냐는 후술) 이게 어느 정도 짬밥이 있는 상태였다면 매우 자유롭고 좋았을 것이다. 나는 혼자 내가 다 해먹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다. 근데 수습 기간이잖아.



이로서 수습 3개월도 지나지 않은 내가 이 회사에 오자마자 한 건 코엑스 가서 쌩쇼하기, 수작업으로 데이터 분석하고 보고서 작성하기, 다른 사람 플젝 도와주기,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서 아이디어 100개 내기, 중간 보고서 혼자 쓰기.



중간 보고서는 그냥 데이터 정리하듯이 쓰면 안되고 상당한 포장력이 필요하다. 완벽한 인포그래픽. 군더더기 없는 요약. 까무러칠 듯한 논리력. 난 오직 그렇게 멋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가짐 뿐이었다. 또 그냥 멋지게만 쓰면 안되고 근거는 다 있어야 한다. 스트레스 받아.


멋지게 쓰다가 잠시 현자타임이 와서 잠깐 등받이에 기대 쉬고 있는데, 누가 인기척도 없이 스윽 옆에 다가왔다. 그러고선 내 눈치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F는 머쓱한 얼굴로 조용조용히 내게 말을 걸었다.



F: 혹시 잠깐만 봐도 돼요...?

나: 네네.

F: 이거.. C님이랑 A님이랑 같이 하신 거예요?

나: 아뇨, 저 혼자.

F: 멋있다.



또 괜히 기분 좋았다.









중간 보고서의 흐름은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대강 다음과 같다.



1. 일정/프로세스/참여 인력 소개

2. 리서치 결과 요약

3. 컨셉

4. 개선안(와이어프레임)으로 연결.



1번이야 절차적인 부분이니 있는 대로 나열하면 되고, 4번은 C에게 받아서 첨부만 하면 된다. 2, 3이 문제다. 2, 3은 따로따로 독립적인 단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 리서치 결과 요약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컨셉을 뭐라고 정할 것인가?

- 리서치 결과부터 컨셉까지 어떻게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여줄 것인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론이 우리 모두가 잘 아는 퍼소나, 유저 시나리오다. "리서치를 했더니 유저 모델이 2~4개 정도 나왔고, 이 모델에 따라서 시나리오/flow가 이러이렇게 나오고, 이거를 보다 보니 이 시나리오에서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러이러한 컨셉이다!"가 일반적인 흐름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유저 리서치를 할 때 어떤 방법론을 썼던 간에, 이를 다른 이해관계자들에게 보여줄 때는 퍼소나와 시나리오만큼 간편한 해결 방법이 없다. UIUX 포트폴리오에 괜히 퍼소나들이 잔뜩 들어가는 게 아니다. 유저 모델을 대충 3개 정도 짜서, 이 모델들의 서비스 사용 시나리오를 그리고, 문제들을 뽑는다. 여기까지는 별로 문제될 게 없다. 퍼소나를 만드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 퍼소나/시나리오에서 "흐름"이 보이느냐인데, 이거를 사실... 자력으로 보는 게 매우 어렵다.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이라 뭐라 설명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러운가?'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어디가 어색하고 어디 부분이 이해가 안되는지 직관적으로 꼬집을 수 있지만, 만드는 내 입장에서 보면 내가 만든 결과물이다 보니 다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UX 컨셉도 문제다. UX 컨셉이 뭔가? 영단어 키워드? UX Principle? 인사이트? 시나리오 그 자체? 그 누구도 컨셉의 정의를 알려주지 않는다. 톤도 문제다. 외부에 공유할 문서인 만큼, 보고서 자체에 내포되어야 할 브랜드 톤도 중요하다. 클라이언트가 진지한 톤을 좋아하는지, 가벼운 톤을 좋아하는지, 그 가벼운 톤이 이런 가벼운 톤이 맞는지, 말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하우스에서는 고민을 하지도 않을 부분을 우리는 고민을 해야 한다.


이론으로 되는 부분이 아니다. 공부한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메타인지로 해결하는 것도 다 한계가 있다. 이걸 판단하는 데는 반드시 경험이 필요했다. 근데 난 뭐지? 난 인턴이잖아.




나는 보고서를 쓰다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막혔다. 고민이 됐다. 아이디어 스케치할 때는 '아이디어의 기준이 뭘까?' '이렇게 대충 그려도 될까?' '현실성을 정말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이런 근본적인 실무 작업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방향성을 정하는 건 완전 별개의 고민이었다.



나: 이걸 내가 하는 게 맞나?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이 일을 내가 할 수 있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건드려도 되는지에 대한 리스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표현해도 틀리진 않을 것 같다. 난 항상 내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신 못 차리고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다.


난 욕심이 매우 큰 편이다. 그리고 그게 별로 사회적으로 좋은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 내가 리드도 아닌데 이런 방향성 같은 거 고민을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나: 난 그냥 신입이잖아.

나: C는 제대로 이거 봐주지도 않을 텐데.



C는 한 가지 안 좋은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비단 C만의 문제는 아니고 사실 G도 어느 정도 겹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C와 G는 둘 다 부하에게 명확한 피드백을 잘 해주지 않는 편이었다. 그 이유는 둘이 서로 다르겠지만... 이 얘기를 하려면 내가 IDI 보고서를 혼자 쓰고 있었던 그때 상황으로 잠시 돌아가보자.




코엑스에 다녀온 후, 보고서를 작성하던 날.


G 팀장님은 본인이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마구잡이식 인터뷰를 진행했던 사람답게, 분석 보고서를 쓸 때도 거의 터치 없이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C와 B가 그 점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나도 사실 분석 보고서를 완전히 혼자서 진행한 건 아니다. 데이터 분석 자체는 거의 내가 도맡아서 했지만, C는 최소한 문서의 형식은 만들어주고 다른 작업으로 옮겨갔고, 내가 물어보는 것도 친절하게 다 대답해주곤 했다. (그것과 별개로 내가 질문하는 걸 무섭다고 말하곤 했었다...)


다만, C는 내가 질문하는 것엔 대답을 다 해주었지만 그건 지식적인 부분이었지 직접적인 '피드백'을 해주진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쓴 분석 결과와 인사이트에 평가를 일절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난 그 점이 불만스러웠다. 내가 옳게 가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하기 어려웠으니까.



C: 수고 많으셨어요! 어휴, 할 일이 너무 많죠?



이런 대답 뿐?



나는 사수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C에게 항상 많은 질문을 날렸고, C는 이런 나의 성향을 피드백 요청보다는 커뮤니케이션 정도로 받아들였던 것 같았다.



반면, G 팀장님한텐 직접적으로 내가 피드백을 요청드린 적은 없다. 당연히...


젊으신 분이라고 해도 팀장이다. 팀장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대부분의 실무진을 봐주시는 실장급이다. 우리 팀만 봐주시는 분이 아니라서. 직접적으로 뭔가 물어보고 하는 건 부담스럽다. 게다가 이게 더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분 관상이 애초에 피드백을 잘 해줄 것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당장 뭘 해야 할지도 일부러 두리뭉실하게 농담식으로 넘기시는 분인데,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접는 쪽이 자연스럽지 않겠나.



그래서, 그런 면에서 나도 C에게 공감하는 점이 있었다.



나: 뭔가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놓인 느낌이네요. 그 짤 있잖아요. 대학원생 짤. 소 한 마리 갖다주고 알아서 요리해먹으라고 하는 교수.

C: ㅋㅋㅋ 아 진짜 완전 그거 맞다니까!

B: 아니 최소한 포크랑 나이프는 줘야 될 거 아니야.

나: 그니깐. 저희가 언제 하나하나 살 발려서 입안에 넣어달랬나요?

C: ㅋㅋㅋㅋㅋㅋ 아 너무 웃겨.


C: 아효... 제가 뭐 어떻게든 해봐야죠. 제가 여러분한테 수저 정돈 줘야 하지 않겠어요. 저만 믿어요.



팀장님이 우릴 내버려둔 건 내 생각에 아마 C가 이미 대기업에서 온 경력자 출신이라서 좀 더 취급이 조심스러웠거나 혹은 간섭이 불필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C는 큰 프로젝트를 해본 경험은 많았지만 큰 회사에서 있었으니만큼 본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도해본 경험은 당연히 없었다. 본인 입으로 자신은 체계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일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들어보면, 우리 회사처럼 매우 적은 인원으로 스케일 작은 프로젝트를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곳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게 당연했다.


아니면 팀장님은 순수하게 C의 실력을 보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왜냐하면 C도 그 당시에 회사에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었으니까. 저연차인 나와 B만 역량 검증이 필요하단 법이 있나?


안타깝게도 C는 실력 여부와 상관없이 팀장님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고, 일은 그때부터 꼬였다. 여러 의미로.




중간 보고서를 썼던 그날.


C는 여전히 자기가 맡은 일을 쳐내느라 내가 한 작업을 검토할 시간조차 별로 없어 보였다. 원래 중간 보고서를 쓰는 역할은 C였기 때문에, 내가 대신 맡게 되었으니 최소한 중간 중간에라도 와서 과정을 한번 볼 줄 알았다.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궁금하지 않나? 자기 부하가 자기가 안 보이는 데서 일을 다 망칠 수도 있는데 그런 걱정은 안 드는 걸까? 날 너무 믿는 거 아니야?


왜 피드백을 안해주는 걸까.


내가 상처 받을까봐 말을 아끼는 걸까? C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정말로 바쁘고 정신없어서? 그런 거라면 내가 타이밍을 조율하면 된다.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어떻게 할까.



C한테 한번만 더 물어보자. 어쨌든 중간 보고서는 내가 100% 혼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와이어프레임이 어떻게 되어가는 지도 모르는 인턴따리가 프로덕트 방향성에 대해 쏼라쏼라 할 수 있을 리가. 나는 G 팀장님께 향하려던 발걸음을 다시 한번 C에게 옮겼다.



나: 한번 좀 봐주실래요? 괜찮은가요?



답변이 돌아왔다.



C: 음... 태클 걸 건 많긴 한데... A씨 야근하면 안되니까.



나는 좀 답답했다. 야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사정이고.


난 C가 내 사정을 굳이 배려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한번 더 물었다.



나: 괜찮아요. 그냥 말씀해주세요.

C: 아니에요.



왜 말 안해?



난 한번 더 캐물었다. 그러자 C는 말을 회피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아까 내가 한 생각을 전부 취소했다. 이건 배려도 피곤함도 무관심도 전부 아니었다.


리스크 회피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계산된.



나는 그냥 나 혼자 결론을 내렸다. 나 혼자 판단했다. 보고서든, 방향성이든, C에 대해서든. 그렇게 하도록 당신이 날 내버려두었으니까.






C는 책임감이 없지 않았다. 책임감이 없다는 것과, 책임이 나오지 않게 사전에 회피하는 것은 좀 다르다. 그게 그거라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후자는 정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그리고 C는 '선을 넘은 적은 없다'.


최소한 C는 자기가 맡은 일에는 책임감 있게 했다. 게으름 피우거나 다른 걸 할 여력이 진심으로 없어보였다. 점심시간에도 일을 한다는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었다. 단 5분도 허비하지 않고 칼같이 점심시간을 사수하는 나와 다르게 C는 항상 초췌한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돈도 나오지 않는데도...


그렇게까지 와이어프레임 작업이 양이 많은가. 솔직히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와이어프레임 작업을 아이데이션 시작할 때 거의 동시에 시작했는데, 그러니까 거의 3~4주째 붙잡고 있는 셈이다. B가 중간중간에 다른 업무로 빠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간까지는 B와 계속 같이 공동으로 하고 있었을 텐데.


업무 중간중간에 30분씩 수다 떨고 갑자기 카페로 단체로 불러내서 나까지 1시간 넘게 시간 소모 시키고, 그런 것들만 없었다면 진작에 끝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 B는 여러 작업을 동시에 병행하는데도 묵묵히 자기 일 쳐낼 거 다 쳐내고 하는데 말이지.


이미 언젠가부터 나는 매우 편향적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건 선호도 같은 문제는 전혀 아니었다. 나는 C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G 팀장님은... 잘 모르겠다. C는 그래도 책임감 있는 모습이 보이기는 하는데, 팀장님은 솔직히 아예 안 보인다. 말버릇부터 '대충 해라' 이신 분이다. 상사로서 신뢰가 갈 턱이 없다.


그러니까 난 비합리적인 서술자라는 뜻이다.



나는 조급했다. C가 여력이 없는 만큼 나도 없었다. 지금 남 평가질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괜히 맡았다고 후회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애초에 이러려고 중간 보고 작업을 맡았다.


나는 팀장님이 순식간에 복도를 후욱 초스피드로 지나갈 때 황급히 팀장님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모니터를 가리켰다. 좀 조급했다.



나: 팀장님, 이거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많이 조급했다. 뭐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았고, 사회생활 필터링도 없이 다짜고짜 모니터를 들이밀었다. 내가 먼저 하겠다고 C한테 건방지게 나서기도 했고, 내가 C보다 잘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있었지만 객관적인 확신은 전혀 없었다. 팀장님은 와서 스윽 모니터를 보셨다. 결론은 3초만에 나왔다.



G: -_- (고개 끄덕) (다시 가던 길을 간다)



...보긴 하신 걸까?



아무튼 대충 아예 얼타지는 않은 모양이다. 내가 맞게 했다는 확신은 아직 생기지는 않았지만... 아니면...



G: (갑자기 다시 빙 돌아서 오셨다) 워딩을 이렇게 바꿔보는 건 어때요? 이거 단어 하나만.



아주 조금은 안심했다.




나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나: 이 보고서를 저 혼자서 판단할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좀 같이 봐주실래요?

G: A씨가 그거 맡기로 했어요? 혼자?

나: 네. 근데 좀 고민되는 부분이 많아서요. 혹시 나중에 좀 여쭤봐도 될까요?

G: 그럼요. 당연하죠.



그날부터.


나는 팀장님과 며칠을 늦은 밤까지 같이 야근을 하면서 중간 보고서를 써내려갔다. 중간에 컴퓨터가 맛탱이가 가서 공유작업이 이상해져서 당혹스럽기도 했다. 폰트는 깨지고, 간격은 망가지고, 이미지 화질도 무너지고...



G: 괜찮아요. 제가 고칠 테니 파일만 로컬로 먼저 보내줘요.



그리고 난 확신했다.


어느 쪽이 진짜 내 상사인지.






어느날 아침.


중간보고서에 와이어프레임을 첨부해야 해서, 와이어프레임 리뷰도 할 겸 네 명이서 모여 정기 회의 시간을 가졌다.


피그마에 뭔가 되게 많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고, 솔직히 나는 그걸 보고 '저건 뭐지?' 라는 벙찐 얼굴표정을 짓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와이어프레임 작업에서 완전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 애초에 무슨 화면을 내가 참고해야 할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건 그냥 혼돈이었다.



G: 지금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브리핑 좀 부탁합니다. 완성된 부분은 있나요? 지금 다 완성할 필요는 없지만 완성된 부분이라도 먼저 클라이언트 쪽에 보내려 해요.

C: 양이 좀 많아가지고요. 저희가 한 화면 한 기능만 만드는 것도 아니고 해서 케이스도 많고 해서 오래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G: 저도 이해해요. 솔직히 많기는 하죠. 요즘 많이 고생하는 거 다 알아요. 특히 우리 1팀.

C: (한숨) 저랑 B씨랑 맨날 점심시간에도 밥도 못 먹고 일했어요. 요즘 점심을 거의 3시쯤에 먹는 것 같아요. 저는 괜찮은데 B씨가 너무 고생하죠.

G: 에구, 밥은 먹어가면서 하지.



즉 팀장님의 질문에 대한 C의 대답을 요약하면 '완성된 부분은 없다'라는 뜻이다.


이 대화를 듣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이거였다.



둘씩이나 붙었는데 왜 이렇게 느려?



나와 반대로, G 팀장님의 말투는 항상 부드러웠다. 항상 먼저 부담 갖지 말라고 얘기하고, 굳이 공사구분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고, 요즘 일은 괜찮냐며 힘들면 한번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얘기를 해달라며 그런 말도 항상 빼먹지 않으셨다. 나는 팀장님의 차갑거나 날서 있는 모습, 예민하게 말이 튀어나온 모습, 감정이 들어간 모습 자체를 본 적이 없었다.


참 신기하지.



C와 B가 공동제작한 와이어프레임(피그마) 화면을 스크린에 띄워두고, 화면을 이동해가며 와이어프레임을 리뷰한다. 팀장님은 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여가며 간간이 C에게 질문을 날렸다. 상당히 깊숙한 부분까지. 나는 옆에서 지켜보았다. 꽤 즐거웠다.



G: 이 화면에서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을 사용한 이유는 어떤 건가요? 각각 어떤 의미를 갖고 있죠?

C: 음... 빨간색은 위험하다, 경고의 의미에서 빨간색을 사용했고요. 초록색은 가장 좋은 상태라는 의미에서.

G: 노란색은? 보통 노란색은 어떤 색깔이죠? 어떤 걸 나타내는 색이죠?

C: 노란색은... 경고죠.

G: 경고요. 그럼 빨간색과 차이가 뭘까요? 구체적으로 노란색은 어떤 상황에서 많이 쓰죠? 노란색과 빨간색이 각각 의미하는 게 뭘까요?

C: 어...



팀장님은 뭔가 내가 평소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지점을 역으로 더 꼬집어서 깊게 캐묻고 들어가곤 했다. C는 난감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말문이 막힌 건지, 아니면 알고 있는데도 팀장님이 저렇게 나오니 압박을 느낀 건지, 질문의 의도 자체를 모르겠는 건지.



G: 예를 들면 빨간색은 위험 말고도 여러 의미로 쓰여요. 알다시피 가장 대표적으로 심장, 심박을 나타내는 색이죠. 그래서 운동할 때, 강도가 높은 구간에 진입했을 때 심장이 빨리 뛴다, 가장 활발하게 운동 중이다 해서 빨간색을 쓰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 그건 위험한 걸까요? 나쁘다는 걸까요? 한번 생각해볼래요?

C: ......



팀장님은 이번에는 다른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 혈압을 재는 페이지라서 전반적으로 붉은 계통 색상이 사용되었다. 배경색부터 기능 색까지 붉은 빛이 돌았다.



G: 이 화면에서 여러분이 사용했듯이 붉은색은 혈액, 심장이랑 직결된 색깔이잖아요. 그런 의도로 빨간색을 사용한 거겠죠?

C: 네.

G: 빨간색은 가장 눈에 띄는 색깔이잖아요? 눈에 잘 들어오죠. 그래서 위험을 알려주는 색상으로 많이 사용이 되어왔고.


G: 그런데 요즘은 이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한번 다른 서비스 염탐해보고 올까요?



팀장님은 구글을 켜서 해외 기업 홈페이지를 찾아보게 시켰다. 그리고 홈페이지를 쭈욱 훑어보며 똑같이 혈압을 재는 화면이 나와있는 페이지를 찾았다. 그리고 내가 그 서비스 화면들을 보고 하나 특이하게 생각했던 건 이거였다.



나: '아니 전반적으로 배경이 다 어두침침하네. 색깔 자체가 별로 없네.'



G: 빨간색이 의외로 그렇게 많이 사용이 안 됐죠? 봐봐요.


G: 전반적으로 거의 다크 계통이잖아요. 그럼 빨간색은 언제 나올까요?

B: 그럼... 정말 경고를 해줄 때만 튀어나온다던가...

G: 그럴 수도 있죠?



팀장님은 정답을 알려주진 않았다. 그 대신 다음 화제로 들어갔다.



G: UX를 하려면 먼저 그 사람들의 문화를 잘 알아야 해요. 다른 회사는 어떻게 색깔을 썼는지. 직접 홈페이지 가서 찾아도 보고. 디스플레이에 정보를 어떻게 띄우는지, 어떤 색이 사용자에게 자연스러운지. 예전부터 관습적으로 어떤 색을 많이 사용해왔는지. 그래서 사례 조사를 많이 해보는 게 중요해요. 막말로 사실 다 베껴쓰는 거죠, UX라는 게.




우리가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게 질문을 던지는 사수와,


우리가 더 힘을 낼 수 있게 확실한 응원을 보내는 사수.


둘 다 좋은 사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판단의 확신을 주는 사수가 필요했다.




그래도 둘 중 어느 쪽이 나에게 더 낫냐고 선택을 강요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굳이 선택을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확장은 나 혼자선 어렵지만, 확신은 언젠가 혼자서라도 쌓이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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