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회의 01: 나는 당신들의 칼이야

의도치 않게? 날카로운.

by 블루잉오렌지



전편: https://brunch.co.kr/@blueingorange/130




우리 프로젝트는 일주일에 한번씩 클라이언트 쪽 대리님, 과장님과 쭈욱 정기 회의를 열어 커뮤니케이션을 이어왔다. 보통은 우리가 방문하기보다는 두 분이 우리 회사로 찾아오셨다. 프로젝트의 규모가 꽤 커서였는지, 비대면이나 유선 소통보다는 대면으로 회의를 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대리님, 과장님은 두 분 다 내가 흔히 생각하던 '대기업 갑'의 스테레오타입 이미지와는 정반대셨다. 갑질은 고사하고 우리 회사를 동등한 메이커로서 존중을 해주셨고, 요구를 무작정 해오는 게 아니라 업무 범위, 자기들이 해야 할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구분짓고 그 선을 지키시는 분들이었다. 말로만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라 또한 직접 자기들이 나서서 행동으로 보여주시던, 대기업치고는 상당히 애자일 스타일이었다.



과장님은 우리 팀의 G 팀장님과 비슷한 위치이며, 대리님은 (인터뷰 편에 나오신 그 생수남이 맞으시다) C처럼 실무 PL이다. 과장님은 특이한 뿔테안경을 쓰고 계신, 항상 허허 너털웃음을 짓고 계신 보살 같은 성격이었고, 대리님은 반대로 까탈스러운 공돌이 스타일이었다. 두 분의 성격은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두 분 다 내가 생각하던 대기업이 권위주의적이고 절차지향적일 거란 편견을 부숴주셨다는 점은 동일했다.



과장님: (커피를 인원수대로 전부 사오셨다) 안녕하세요, 주말은 잘 보내셨어요?

대리님: 안녕하세요. (커피를 하나하나 나눠주셨다)

G: 어유, 이런 거 안 사오셔도 되는데. 원래 저희가 챙겨드려야 하는 건데.

과장님: 아뇨, 별것도 아닌데요. 죄송하지만 저희가 시간이 없었어서, 어떤 걸 좋아하시는 지 여쭤봤어야 했는데... 아메리카노로 일단 다 사왔는데, 혹시 못 드시는 분 있으시면 다른 거 사오겠습니다.

G: 아이 괜찮습니다. 사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요 저희야.



참 좋으신 분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중간에 인볼브되었는데도 부담 없이 프로젝트에 적응할 수도 있었고. 대체적으로 난 사람 운은 뭔가 항상 좋았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C: (B를 향해) 대리님 괜찮지 않아요?

B: 네?

C: 한번 잘해봐요. 괜찮지 않아요? 제가 이어줄까요? ㅋㅋ 아 되게 어울리는데?

B: 아 무슨 소리세요... 제 취향 아니에요.



C는 평소에 툭하면 B와 대리님을 엮었다. 대리님이 우리와 나이대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다 보니. 원래도 C는 우리에게 연애 관련 화제를 자주 꺼내곤 했었다. C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우리에게 '결혼 최고'라는 말을 항상 설파하고 다니기도 했다. 나와 B는 C가 그런 말을 꺼낼 때면 비슷한 -_-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여주곤 했다. (C를 좋아하던 B도 연애 화제에선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던 듯했다...)



C: 그럼 A씨는요? A씨랑 이어줄까요? 저 이어줄 자신 있는데!

나: 에에.

B: 괴롭히지 마요.

C: 아니 진짜 잘 어울려서 이러는 거라니까?



당연히 진심은 아니겠지만... 나랑 B가 영 시원찮게 대답하면 C는 눈을 반짝이며 연애 얘기를 이어가는 그런 과정의 반복. 나는 C가 우릴 편하게 생각해서 그런 농담을 던지려니 하며 적당히 넘겼다. 역시 연애 얘기란 여자들의 숙명이나 다름없는 걸까. 나도 익숙해져야 하는 걸까...



우리가 본인을 두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꿈에도 모르실 대리님은, 오늘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타나서 자리에 앉아 브리핑 준비를 하고 계셨다. 대리님의 사적인 성향과 관계없이 대리님은 참 괜찮은 사람이긴 했다. 왜냐하면 정말 틈만 나면 내가 개판을 벌여놓은 작업실에 과장님이랑 둘이서 방문해서 아이디어(낙서)를 관심있게 보고 가시곤 하셨으니까. 프로젝트에 많이 개입하고 논의하고 관여하는 클라이언트는 나쁠 수가 없다. 본인들이 책임을 지겠다는 의향이 있단 뜻이니까.



와이어프레임에 대해 논의하는 오늘 자리에서도.



대리님: (예민한 목소리) 그래서 저희는 정량 데이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고요. 아까 했던 얘기지만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대리님: X 정보가 애초에 저는 이 기능에 왜 필요한 지 잘 모르겠어서요. 저희 컨셉이랑 맞는 것 같지도 않고. 빼야 할 것 같은데요. 저희는 정말 필요한 정보 외에는 전부 빼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C: 음...



'약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와이어프레임(아직 완성되려면 멀었지만)의 홈 화면을 보여주고 리뷰를 하고 있었는데, X 정보가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고 대리님이 이건 아닌 것 같다며 클레임을 걸었던 것이다. 대리님은 X 정보가 아닌 Y 정보가 들어가야 한다고 어필을 하셨고, C는 대리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서로 말이 잘 안 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대리님의 말에는 잔뜩 가시가 솟아있었고, C는 말을 회피했으며, B는 당연히 침묵했고, G 팀장님이 중재를 하려고 했지만 효과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때 팀장님이 나를 쳐다보셨다.



G: 그럼 데이터를 보여드리는 게 맞겠네요. 저희가 작업을 했었던 정량 부분. (날 쳐다보며)

나: ?

G: 로우데이터.



로우데이터요?


그러니까 혹시 제 임의로 여기저기 칠하고 메모하고 난리부르스가 펼쳐져 있는 사용자 20명의 개판 VOC가 펼쳐진 그 개판산발의 구글 시트를 말씀하시는 게 맞는지요?



나: (설마) 구글 시트요?

G: 네.



오.




나는 회의 중간에 회의실을 나가서, 구글 시트(심지어 내 개인 계정이다) 링크를 벌벌 떨면서 슬랙에 보냈고, 그 메시지는 회의실에 있는 매우 큰 스크린에 덩그러니 띄워져, 마침내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개판 구글 시트가 클라이언트 분들께 고스란히 보여지고 말았다...



개판인 자료를 클라이언트에게 보여준다는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더 걱정하는 부분이 있었다.


예전에 어떤 회사에서 면접을 봤을 때, 갑작스럽게 포폴 발표를 요청받아 누가 봐도 발표용이 아닌 길고 긴 노션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면접관 앞에서 즉석으로 발표(라는 이름의 난장판 TMI 투척)를 했던 경험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것과 똑같다. 아주 똑같다.


G 팀장님은 당연히 저 구글 시트를 보신 적이 없다. 저건 내 개인 계정으로, 내가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정리한 대형 메모장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게 대리님과 과장님께 근거로서 제출이 된다. 우리가 데이터를 토대로 디자인을 했다는 근거로서.


G 팀장님은 저 거대 메모장을 설명할 수 있을 턱이 없고, 증명을 하는 건 아마 내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난 와이어프레임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 애초에, 나는 C가 왜 와이어프레임에 X 정보를 넣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난 역으로 데이터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 내가, 이 메모장이 어째서 홈 화면에서 X 정보를 강조해야 한다는 합당한 근거가 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뜻인데...



압박감에 창백해진 얼굴로 X 정보가 있는 페이지를 찾으려다가, 팀장님이 마우스를 가져가셨다. 팀장님은 마우스로 페이지를 옮겨가며, 정확하게 정보 우선순위 관련 VOC가 있는 페이지를 찾아 스크린을 가리키며 '증명'을 시작하셨다...



G: 이 페이지에 있네요. (날 쳐다보며) 그렇죠?



순식간에 긴장감이 가라앉았다.









G 팀장님은 특유의 말빨을 선보이면서, 내 문서를 즉석으로 해석하고 '우리는 철저한 정량적 근거를 토대로 와이어프레임을 만들었다'는 함의를 담아 능숙하게 대리님을 설득해가셨다. 솔직히 감탄했다. 저 혼돈의 구글 시트를 즉석에서 처음 보고 바로 말을 만들어낸다는 게...



G: 이 페이지에 사용자들이 어떤 정보를 우선시 하는지 나와 있는 것 같고요. 오른쪽에 정량 데이터 정리된 부분이 있네요. 이걸 토대로 와이어프레임을 정리했고.

나: (끄덕)

G: VOC 몇 개를 보니 대리님 말씀대로 의견이 좀 갈리는 것 같애요. X 정보가 중요한지 Y 정보가 중요한지. 이거를 나중에 AB Test로 테스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대리님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았는데 잘은 모르겠다. 어쨌든 그 당시 내 마음속엔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만으로 가득했다. 아찔했다.



그때 C가 입을 열었다.



C: 그럼 X 정보를 넣은 이유도 A씨가 설명해주세요.



에?



당신이 넣었잖아. 내가 그 이유를 어떻게 알아?



하지만 대리님의 시선이 자연스레 나를 향했고, 나는 더 고민할 틈도 반박할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즉석으로, 팀장님처럼.


결과적으로. 사람 운이 좋았다.




나: 사실 X 정보가 저희 방향성이랑 막 들어맞진 않기는 해요.

나: 그런데 저 X 정보만 가질 수 있는 의외로 어필할 만한 인터랙션 포인트가 있어서요..

나: 메인 Task에 넣을 순 없다 하더라도, 시나리오별로 케이스를 나눠보면... 괜찮지 않을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고, 대리님도 여전히 입을 열지 않으셨다. 정적을 깬 건 대리님이 아니라 과장님이셨다.



과장님: 네, 한번 AB Test로 실험해봐요. 그게 좋겠네요.



다행이다.




정기 회의가 끝나자마자, C는 속이 시원하다는 상쾌한 낯빛을 띠고 나와 B에게 재잘재잘 말을 꺼냈다.



C: 아까 그 인간 표정 보셨어요? 아니, A씨가 말하자마자 입도 뻥끗 못하더라니까?

나: 네...? 아닐걸요.

C: 아 진짜루.



그 말을 듣자하니, C는 평소에 대리님을 좀 불편해했던 것 같았다. 일단 그 사람 인상부터가 좀 날서고 예민하게 생기긴 하셨다. 부드러움이라곤 코빼기도 찾아볼 수도 없었고, 정량 데이터 중독자라서 C랑 성향도 잘 안 맞을 것 같고. 그것과 별개로 외모는 합격선이었는지 B와 엮어서 로맨스 서사를 만들어대곤 했지만...



그래서 X 정보는 왜 넣었어?




...라고, 물어볼 자신은 없었다. 아직은.



나는 내가 말을 꺼낸 이후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던 대리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침묵하는 사람은 보통 무섭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거기에다가 잠깐 입을 열었을 때 신경질적인 사람은 피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C처럼 관계지향적인 사람이 대리님을 편하게 생각할 리가 없지. 그래서 자꾸 나와 B에게 연애 얘기 같은 쓸데없는 얘기를 해가며 자신의 긴장감을 풀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C는 내가 대리님에게 의견을 얘기한 것을 보고, '한 방 먹였다'라고 표현했다.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나는 오히려 대리님 같은 사람이 편하게 느껴진다. 잘 읽힌다. 데이터를 좋아하는 공돌이 너드들이 그렇듯이 데이터로 얘기하면 빠르게 납득하며, 자기 의견이 꺾였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잘 상처받지도 않는다. G 팀장님이나 C처럼 여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가장 어렵고 불편한 사람은 C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G 같은 사람이다. 단순히 속을 모르겠는 여우들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나는 사람들의 의도를 더욱 과대망상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렇다.



C는 날 왜 그때 대신 대답하라고 등을 떠민 걸까? 내가 말문이 막히는 걸 보고 싶어했던 걸까? 평소에 잘난 척을 그렇게 해댔으니 어디 한번 엿돼보라고 던진 걸까?


G 팀장님은? 왜 그때 나한테 자료를 가져오라 시킨 걸까? 내가 만약 가진 게 없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걸까? 구글 시트 꼬라지를 보고 노답이다 싶어서 본인이 대신 설명을 한 걸까?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데이터와 내 인사이트밖에. 내가 살아나려면 내 실력을 더 키워야 한다. 언제 어디서 갑작스러운 일이 터져도 대응할 수 있게끔. 아무도 날 위해 희생해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C에게서 자꾸 나를 향한 악의를 느꼈다. 악의를 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나는 C가 나를 고깝게 생각하고 있단 증거만 수집하려고 악을 쓰고 있었다. 나는 C의 말을 듣지 않았고, 계속 듣지 않았고, 나 혼자서 C의 의도를 판단 내렸다.



실제로는 안다. C는 그저 리스크를 회피하고 싶어하는 불안한 사람이다. C는 전 회사에서 배운 대로 행했을 뿐이다. C는 나를 좋아하면서도 불편해했다. C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다. 리스크를 떠안고 자신이 공격받아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이상적인 천재가 아니었다.


G는 약삭빠른 사람이었고, 사람이 갈려나가는 구조를 방치하면서 정말 필요할 때만 나서는 '이상적인' 운영자다. C는 G처럼 약삭빠르지 못해서 다른 약삭빠른 방식을 연구해야 했다. 그런 C의 입장에서 가장 편하고 효율적인 도구가 나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가장 위험한 칼이었다.


내가 먼저 선을 그었다. 내가 먼저 거리를 두었다. 내가 먼저 B처럼 굴지 않았다. 내가 먼저 C의 권위를 파고들었다. 내가 먼저 C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내가 먼저 C의 조언을 먼저 전부 모른 체했다.


처음에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거짓말을 했고,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나는 C에게 평가와 판단의 시선을 보냈다. 대기업. 경력자. 그런 것들에 대해. 진짜 유능할까? 내가 의식하는 것보다 C가 더 빨리 내 본성을 알았을 것이다. C가 그거 하나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 눈치 빠른 사람이.



C는 항상 선한 의도를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상사로서, 친구로서, 가끔은 엄마처럼. 나를 챙겨주고, 돌봐주고, 새 회사에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먼저 말문을 터주었다. 감사했다. C는 나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같이 대화를 할 땐 나도 진심으로 편안할 때가 자주 있었다.



근데 나는 선한 의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알면서도 무시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나는 선한 결과만을 좋아할 것이다.








저번에 중간 보고서 쓰는 과정을 잠깐 보여준 이후로 F는 나에게 자주 말을 걸었다. 뜬금없는 걸 물어오기도 했다.



F: 혹시 생일 언제예요...?

나: 네? 3월 25일이에요. 이미 한참 지났죠 ㅋㅋ

F: 아...



며칠 후, F는 나에게 갑작스럽게 생일 선물을 건네왔다.


난 너무 당황스러웠다.



나: 저 생일이 거의 반년 전이었는데...?

F: 별거 아니에요.. 그냥 생각나서 주고 싶어서.

나: 어... 감사합니다.

F: 별거 아니라서 크게 뭐 감사해할 건...



이해할 수가 없다.


곧 퇴사할 사람이, 나중에 볼 일도 없는 사람에게 굳이 잘해줄 필요가 있나?



그래서 난 그런 감사인사 한마디 말고는 더 덧붙이지 못했다. 잠깐 고장나 있었던 것 같았다.


F는 퇴사해서도 만나자는 그런 다정한 소리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말 그대로 선물만 주고 다시 돌아갔다.


그러지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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