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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가 거의 다 된 시간, 와이어프레임 일부를 첨부하여 중간 보고서가 최종 완성되었다.
와이어프레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린 모든 화면을 보고서에 넣어야 하는 건 아니고 개선안과 관련된 대표 화면 몇개만 넣으면 돼서 보고서 제출에 큰 문제는 없었다.
왜 이렇게 와이어프레임 작업이 질질 끌리냐면, 이유가 있긴 있다. 프로젝트 목적과 스케일 상 우리 와이어프레임에는 총 세 가지가 반영되어야 한다.
- 기존 서비스의 전반 디자인/Flow 개선
- 기존 서비스에서 유저의 Pain point 개선
- 새로운 기능 화면 및 Flow 설계(Main)
한눈에 봐도 그려야 할 게 많다. C의 와이어프레임 작업이 오래 소요되는 이유가 있긴 하다. 사실상 전 화면을 새로 그려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
내가 전에 잠깐 확인해봤을 때는 '기존 서비스 UXUI의 전반 디자인/Flow 개편'과, '기존 서비스에서 유저의 pain point 개선' 두 가지는 거의 완료된 것으로 보여 일단 그쪽을 중간 보고서에 집어넣었다. 새로운 기능 쪽에서는 아직 완성된 페이지가 보이지 않았고, 컴포넌트는 뭔가 예쁘게 잔뜩 만들어져 있는데 페이지 자체는 그리다 만 듯한 아이디어들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뿌려져 있어서 그거를 보고서에 갖다 쓰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새로운 걸 만드는 것, 뭘 만들지 결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는 하다. 아이데이션 시간에 C가 냈던 '아이디어'도 사실 '어떤 pain point를 개선한다' 수준이었기도 했었으니 그야 당연히 어렵겠지.
우리 프로젝트는 개선은 둘째치고 새로운 기능 검증이 메인인데. 뭘 먼저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우선순위도 별로 안 잡혀 있는 듯했다.
아무튼... 며칠 간의 쌩쑈 끝에 드디어 중간 보고서 작성이 끝났다.
이를 메일로 클라이언트에게 보냈다. 큰 거 끝냈다는 안심스러운 마음에, 팀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룰루랄라 집으로 향한다. 그다음에 또 어떤 수정 폭탄이 돌아올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건 나중에 메일 답장이 오면 생각해보자...
바로 다음날에 대리님한테서 메일로 피드백이 돌아왔다. 난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대리님: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보고서 잘 확인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노고가 많으십니다.
대리님: 중간 보고서를 방향성에 맞게 잘 작성해주셨으나, 한 가지만 더 추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리님: 이전에 정량 데이터와 IDI 보고서를 잘 작성해주셨는데, 그 데이터들을 컨셉에 대한 근거로서 추가해주시면 더 좋은 보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아... 오케이. 큰 문제는 아니구나. 다행이다.
중간 보고서 자체에 문제는 크게 없고, 유저 데이터를 근거로 좀 더 넣어달라는 말씀이셨다. 뭐 페이지 구성을 크게 바꿀 필요는 없었고, 각 페이지에 VOC들을 좀만 인용해서 붙여주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난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다.
겸사겸사 내가 담당했던 데이터 분석 & IDI 보고서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도 받았다. 이 정도면 꽤 결과가 괜찮았다고 판단 내릴 수 있을 듯하다.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확신만 있으면 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 동기부여가 확실히 된다.
나는 대리님 말씀대로 유저 데이터를 좀 더 보충했고 수정된 보고서를 다시 메일로 보냈다. 답장이 또 금방 날아왔다. 참 빠르셔서 좋다.
대리님: 빠른 수정 감사합니다.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추가 요청은 그 후로 더 들어오지 않았다.
그걸로 내 임무는 완료.
안심스럽다.
G: 잠깐 1팀 다 같이 모여서 회의할 수 있을까요?
중간 보고서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팀장님은 곧장 우리 셋을 전부 회의실에 호출하셨다. 어떤 안건인지는 나도 C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다 같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C: 으휴, 바쁜데 툭하면 회의를 하네. B씨는 지금 시간 괜찮아요? 운영 하는 거?
B: 사실 안 괜찮은데... 오늘 오후까지 바로 마감 쳐야되는 게 있어서.
B: 솔직히 제가 껴봤자 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왜 자꾸 회의에 부르는 지 모르겠어요.
C: 제가 팀장님한테 말해볼까요? B씨는 회의에서 빼달라고? 아니면 중간에 그냥 나가셔도 돼요.
회의에는 참여해야지, 그래도. 프로젝트를 이해해야 하니까.
그러지 않으면 1%의 기회를 0%로 스스로 떨어뜨리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언제나 그랬듯이 G 팀장님의 맞은편에 차례대로 C, 나, B가 앉는다. C는 스크린에 노트북을 연결해 와이어프레임이 그려진 figma 화면을 띄웠다.
G: 아뇨, 그거 말고.
C: 네?
G: 슬랙에 중간 보고서 올린 거 있잖아요. 그거 열어봐주세요.
C: 아. (슬랙을 킨다) 어딜 봐야 하죠?
나: 1시간 전에 올라온 거가 최종 버전이에요. 톡방에 링크 보시고 가면 돼요.
C: 링크가 어디 있지.. 요즘 슬랙을 잘 안 봐서요.
C는 슬랙을 켜서 최종 버전 중간 보고서를 다운로드 받기 시작했다.
파일이 어디 있는지 위치조차 못 찾는 거 보면, 오로지 와이어프레임에만 집중하느라 중간 보고서는 중간 과정이라도 확인도 못한 모양이다. 이제와서 용량도 큰 중간 보고서를 막 다운로드 시작하는 걸 보니.
그래, 검토도 안했구나. 메일도 안 읽어봤구나. PL인데도.
팀장님은 뭐라고 말도 하지 않은 채 C가 PPT 파일을 켜서 화면에 띄울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생각해보면 팀장님은 개구쟁이처럼 보이고 말이 많게 생겼지만, 의외로 침묵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필요한 타이밍에 잡담을 하고. 필요한 타이밍에 감정 케어를 하고. 필요한 타이밍에 유머를 던지고. 긍정적인 피드백도 부정적인 피드백도 절대 하지 않는다. 판단을 속으로는 하고 있겠지만 그게 바깥으로 절대 튀어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는 팀장님의 그런 모습이 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요즘은 팀장님의 그 '능숙한' 말 패턴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성적인 사람이란 게 눈에 보인다.
C가 드디어 PPT 메인 화면을 띄우자마자 G 팀장님이 C에게 입을 열었다.
G: 13페이지 좀 띄워주세요.
13페이지는 UX 컨셉 방향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소개가 들어가는 페이지다. 우리가 낸 아이디어(100개)들에 기능 딴으로 카테고리를 각각 부여한 다음, 이를 다섯 가지 UX 전략으로 수렴시켜서 앞으로 프로덕트가 어떤 원칙대로 기능을 만들어야 할지를 정리해본 거다.
다른 뭐 예를 들어서 증권 앱의 경우(내가 방금 지어냈다) '사용자의 금융 이해도에 따른 맞춤형 항목을 추천', '사용자끼리의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커뮤니티성 강화'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드는(혹은 만들) 기능의 목적과 가치를 좀 더 상위 딴에서 분류해보는 것. 이러한 전략들이 여러 가지 기능이 나올 수 있는 근거 있는 배경이 되어줄 것이며, 프로덕트의 총체적인 컨셉을 디벨롭하는 데 사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 페이지를 만들면서 고민한 부분은 이거였다. 전략은 보통 여러 개일 수는 없다. 이 다섯 가지 전략을 우리가 전부 기능을 통해 구현할 순 없을 것이다. 리소스가 부족하니까. 우리는 결국 이 중 하나의 방향성을 고르거나 합쳐서, 하나의 기능만을 만들어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다섯 가지 전략별 우선순위와 정합성을 가늠해야 했다. 나는 이 우선순위를 판단할 수 있는 레벨은 절대 아니었고, 그래서 유의미한 방향성 '후보'를 다섯 가지로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를 며칠 전에 팀장님한테 한번 여쭤본 적이 있었다. 이 다섯 가지 중 어떤 게 우리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할까? 그때 팀장님은 이걸 우리가 중간 보고서에서 바로 판단 내릴 건 아니라며 판단을 유보하셨다.
G: 어떤 걸 해야 할지 우리가 정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이 다섯 가지를 그쪽에 제안하는 거죠.
나: 아, 그럼 대리님 과장님 두 분이서 정해주시는 거네요. 하기사.
G: 그렇죠. 근데 우리도 나름 그쪽이랑 얘기할 수 있도록 우리끼리 관점은 정해둘 필요가 있어요. 저희가 결정을 하는 건 아니라도, 어느 정도 적합한 방향성을 먼저 잡고 적합한 아이디어를 그쪽에 던져서 설득을 할 필요는 있거든요.
그래서 그 '관점'을 지금 얘기해보겠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만 팀장님이 먼저 꺼낸 얘기는 내 예상이랑은 좀 많이 빗나갔다.
심하게.
G: (C에게 슬라이드를 가리키며) 이거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나: ?
C: 네?
나는 그때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팀장님의 그 말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팀장님의 말에서 무언가 뚜렷한 의도를 느꼈다.
나는 희미한 회색으로 띄엄 띄엄 그려져 있던 경계선에 확 검은빛이 짙게 올라온 것을 느꼈다. 그 희미한 선을 밟았다 말았다 와리가리 하며 입을 터시던 팀장님이 오늘만큼은 그냥 성큼 선을 넘어, 넘은 곳에서 가만히 두 발을 딛고 서서,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G: 설명해보세요.
C: 어... 저 페이지를요?
G: 네.
C는 나조차도 눈치챌 정도로 매우 당황한 목소리로 페이지에 적힌 제목과 내용을 국어책 읽듯 그냥 읽어내려갔다. 그러자 팀장님은 C의 말을 중간에 멈추게 했다. 난 그걸 지켜보며 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감정이 부글부글거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G: 아예 처음부터 해볼까요? 첫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봐보죠.
G: 제가 이걸 처음 본다고 가정을 해보고, C 씨가 저를 이해시켜보세요.
팀장님은 와이어프레임을 딱히 띄우지 않았다. 그냥 내가 쓴 보고서를 띄워두고, C에게, '이 보고서에 대해 발표를 해보아라'라고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나와 B가 지켜보고 있는 넓고 텅 빈 회의실 한가운데서.
일반적으로는 C의 와이어프레임을 같이 띄워두고, 그 와이어프레임과 방향성을 얼라인해가는 회의가 진행되는 게 맞을 것이다. C가 여태까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와이어프레임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투트랙으로 이어지던 우리의 프로젝트를 이제는 하나의 줄기로 수렴을 시켜야 하니까.
하지만 우리 회의실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C: ......
G: ......
G: 그럴 수 있어요.
G: 아직은 적응이 필요하니까.
팀장님은 칼을 집어넣으시고,
칼집으로 C를 찔렀다.
한 번도 자신의 의도와 판단을 입밖에 내지 않던 팀장님이 처음으로 선을 넘어 입밖으로 드러낸 순간, 난 그 장면에서 무수히 많은 정보를 얻었다. G 팀장님, C, 그리고 나에게 엮인 이해관계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강제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불길한 정보 말이다.
평가.
자격.
경력.
역량.
그런 몰라도 되는 차가운 정보들.
결과적으로 나는 팀장님의 칼이었다. 팀장님은 나를 휘둘러 C를 찔렀다. 나를 이용해서 C의 권위를 깎아내렸다. 우리 회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기업에서 매우 스케일 큰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온, 박사 출신의 경력자를 다정하게 위로하면서. 팀장님의 속내에 무슨 의도가 들어있는지 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칼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깨달은 순간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통쾌함?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위험만을 느꼈다. 애써 숨기고 있던 비밀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수면위로 올라오는 것. C가 말을 거의 잇지 못하는 그 기나긴 정적 동안 나는 나와 C가 서로를 향해 힘겹게 쌓아올린 모래성 같은 관계가 전부 무너지는 위험을 느꼈다. 이미지가.
우리는 서로 알면서도 모른 체 했었는데. 서로를 향한 그 투명한 악의 말이다. 우리 눈에도 서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너무나도 맑고 투명한 악의를.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C가 나를 찾아왔다. C는 딱 한 가지만 물어보고 자리를 떠났다.
C: 아까 그 페이지 팀장님이랑 같이 작성한 거죠?
나: 그 페이지는 제가 혼자 작성했어요.
중간 보고서를 제출하고 며칠 후.
우리 와이어프레임의 새 기능 화면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지만, 와이어프레임의 방향성은 어이없게도 한순간에 결정이 되게 되었다.
대리님이 시안을 가져와서 우리 쪽 시안들은 다 엎어버렸기 때문이다.
대리님: 와이어프레임 시안을 저희 쪽에서 좀 그려봤는데요.
대리님: 이 방향대로 디벨롭해서 진행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결정되었다.
C가 그리던 새로운 기능 페이지들은 전부 폐기되고.
그리고...
대리님의 와이어프레임엔 아이데이션 시간에 내가 처음으로 그려서 팀에게 소개한 그 낙서 같은 아이디어가 메인 화면에 반영돼있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계속 계속 계속 그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내 아이디어가 케이스가 달라져도 유지되는 화면의 기준 구조가 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나 말고는 그거 다들 신경도 안 썼는데.
G: 원래... 와이어프레임 그리는 건 저희 역할이죠. 그렇죠?
벽에 붙여진 내 아이디어를 보고 괜찮아서 반영해준 걸까? 아니면 우연히 같은 생각에 도달한 걸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그 아이디어는 절대로 '정석적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친숙한 UI를 싹 다 빼버리고 프레임을 갈아버리는 위험한 쪽에 가까웠지.
나는 그때 가슴이 이상하게 벅차오르는 황홀경 상태였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나조차도 '스쳐지나가는 경험' 수준으로 치부하고 대강 넘긴 과도하게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누군가가 일부러 유심하게 관찰하고 반영해준다. 혹은 그게 꼭 아니어도 그냥 나랑 비슷하게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기분이 좋았다.
G: 우리 와이어프레임이 완성되기도 전에, 클라이언트가 와이어프레임을 다 본인들이 해서 가져왔다는 건... 사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죠.
G: 저였다면 사전에 해둘 수 있는 건 미리 다 해놔서 시간을 절약했을 거예요.
C: ......
맞아, 난 그때도 칼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왜냐하면 내 기분이 좋았으니까.
나 자신의 생각만 했다. 그 칼에 찔리는 사람의 입장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이건 과거의 이야기니까.
나는 여러 사람의 칼이 되어 휘둘리는 동안, 내 안에 있는 불안과 위기의식을 없애는 방법을 깨달았다. 위험한 확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G: 일단 한번 볼까요? 저희끼리 AB 테스트. 클라이언트 쪽에서 준 시안(2안)이랑 1안 둘 중 뭐가 더 좋아 보여요?
C: 1안이요.
B: 1안이요.
나: ......
G: A씨는요?
나: 전... 2안이요.
G: 저도 2안이라 생각해요.
나만 줄다리기 하고 있는 건 아닐 거야.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