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책을 읽는다는 것

by 정제이

해외에서 살다 보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은 이거다.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세요?"


물론 집안에서 한국어만 쓰도록 고집하신 부모님의 규칙도 한몫했겠지만, 나 역시 한국어를 계속해서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한국어로 해도 어려운 말이 영어로 들릴 때가 있고, 반대로 영어로는 단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한국어로는 그나마 문맥을 가늠할 수 있는 주제들이 있다. 그 벽을 허물고자 읽는 것이 바로 한국어로 나온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로 된 책은 아예 읽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장르는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영어로는 문학적인 소설을 더 많이 읽고, 한국어로는 비문학적인 정보 전달 위주의 책을 읽는다.


영어는 내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이다. 다시 말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쳐 인턴십 기간 중에도 내가 영어로 읽은 것들은 주로 고전 문학, 논문, 포럼, 온라인 기사 등등이다. 내가 원하는 글을 읽은 적이 많이 없다. 그렇다고 마냥 쓸데없는 시간들이었는가? 그건 아니다. 원하는 글을 읽은 적이 많다는 것은, 원하지 않아도 참고 견디며 읽었다는 것이고, 그중에서 내가 흥미로워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일하면서 제일 많이 읽는 것은 이메일과 브리핑 문서들이고, 재미없지만 다 읽어야 일을 할 수 있다. 재미없지만 이 이메일이 정말 나의 안위를 걱정하며 필요한 질문을 하는 이메일인지, 아니면 나를 걱정하는 척하며 재촉하는 이메일인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맞다. 우리가 숱하게 풀어온 "다음 지문을 읽고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시오."를 써먹는 최고의 기회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원하는 글을 읽을 시간이 많이 없었기에, 제일 좋아하는 소설을 읽고 싶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보다 판타지나 SF 장르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중세 시대나 아포칼립스 또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서 보이는 서구권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는 과거에 남녀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엿볼 수 있고, 미래의 모습을 담은 시대는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 때 누가 어떤 자세로, 어떤 분위기의 언행으로 헤쳐나가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태도"의 차이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생각보다 매번 신선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한국어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끽해야 학원까지 싹 끌어모아도 기억이 나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고사하고 뭘 배웠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어릴 때부터 꾸준하게 읽은 것이 바로 소설책과 만화책이다. 아직도 너덜너덜하게 읽은 "빨간 머리 앤" 책 커버가 생각날 정도로 나는 세계고전문학을 좋아했다. 더불어 한국 소설에서 배운 어조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며 얻은 상상력이 지금 내가 글을 그나마 예쁘게 쓸 수 있게 해주는 기반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문학은 더욱이 어려워 보이고 건드리고 싶지 않은 분야였었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있다. 비록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는 분야일지라도, 한국어와 영어 중 어떤 언어로 먼저 읽고 싶냐 묻는다면, 이상하게도 한국어로 먼저 읽고 싶기 때문이다.


마케팅을 예로 들자면, 마케팅은 언제나 관심 레이더에 있었던 분야이지만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영 찾기 힘들었던 분야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어로 다짜고짜 마케팅 기초 상식과 기본 용어 리스트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대충 여러 번 읽고 훑어본 뒤에서야 나는 여태 회사에서 어떤 대화를 하려 했던 건지 이해했고, 그다음에 영어로 마케팅 강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결국 어떤 지식에 대한 본질은 한국어로 알고 싶어 하고, 더 알고 싶어질 때 영어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신기하면서도 어찌 보면 언어 능력도 유지할 수 있는 윈윈이었다. 어릴 때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였을까? 이제는 더 이상 소설을 손에 잡고 싶지 않은 걸 보면 한국어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조금은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한국 책은 지식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리기 쉬운 한글의 문법도 다시 복습하는 자료다. 물론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 수능을 준비했어도 한글 문법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만큼 일상에서 쓰지 않기 때문에, 특히 글은 더욱 쓸 기회가 없기 때문에 눈에 계속해서 익히려고 한다. 나는 언어를 듣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읽고 쓸 줄도 알아야 진정으로 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맞기 때문에, 나름대로 작은 노력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에서 살게 된 이후로 꾸준히 한국 책을 읽은 것은 또 아니니. 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읽은 책도 많지 않고. 그래도 읽으려고 생각해 온 고등학생 때의 나에게 어른이 되어 바라보는 내가 칭찬 한 마디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단순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국어를 계속해서 말하고 싶은 나의 소박한 염원도 담겨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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