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역할을 못하는 낡은 TV일지라도
우리 집 안방에는 오래된 TV가 있다. 온통 검은색의 단순한 디자인이다. 요즘 나오는 TV는 평면 TV다 뭐다 해서 납작하고 날렵하던데 이 TV는 퉁퉁하다. 작은 사이즈도 아닌 것이 뒤쪽도 납작하지 않아 나름 공간을 차지한다. TV 아래는 타원형 받침이 달려 있다. 이 받침 위에는 닦아도 닦아도 계속 먼지가 쌓인다. 먼지가 달라붙기 좋은 반질반질한 형태라 더 그런 듯하다.
이 TV는 원래 엄마의 것, 아니 본가의 것이었다. 아빠 돌아가시고 치매 초기의 엄마를 우리 집에 모시게 되면서 가지고 온 것이다. 엄마 방에 두었던 이 TV는 엄마도 돌아가시고 난 후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부모님의 물건 중 하나다. 나는 결혼할 때부터 TV를 두지 않고 살았다.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만화를 볼 때도 모니터 화면이면 충분했다. 모니터 화면도 나 어린 시절의 TV만큼 크니까.
엄마의 치매가 심해져서 요양원에 가시게 되면서 엄마 방의 가구며 물건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때 이 TV도 정리당할 뻔한 품목 중 하나였다. 문득 이걸 모니터로 사용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생각하기에 좋다고 생각되는) 영화들을 보여주던 참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 <에일리언>, <터미네이터> 등등. 내가 좋아했던 멋진 영화들을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이들과 함께 봤었다. 큰 아이는 지금도 자기의 인생 영화로 <인생은 아름다워>를 꼽고, 둘째 아이는 <에일리언>의 외계 생명체를 따라 그리기도 할 정도로 좋아했다. 이제 이런 영화들을 더 큰 화면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TV는 우리 집 안방에 자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니 함께 영화 볼 일이 줄어들었다. 당연히 TV도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치워버려야 되나 하던 즈음, 나를 위해 이 TV가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덕질을 위한 장비로 말이다.
코로나 시작과 함께 한 연예인을 덕질하게 되었다. 코로나에 걸린 자가격리 기간 동안 방에 갇혀서 미친 듯이 덕질을 했다. 이 연예인이 등장하는 DVD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콘서트를 많이 했던지라 일본에서 발매된 DVD, 블루레이를 직구했다. 이 연예인이 출연한 드라마 DVD도 구입했다. 처음에는 컴퓨터 모니터로 영상을 봤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성에 차지 않았다.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다. 이제 장비를 더 갖추어야 했다. 프로 덕질러들의 추천을 받아 DVD 플레이어를 구입해 TV와 연결했다. 신세계가 열렸다!!! 커다란 화면으로 드라마를 보고 콘서트 영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일할 때도 틀어놓고 일하고, 쉴 때도 틀어놓고 쉬었다.
그래도 가끔은 아이들과 이 TV를 사용한다. 어제는 둘째 아이와 함께 노트북을 연결해 넷플릭스 <최강 야구> 2024년 시즌 마지막 경기를 봤다. 올해 나의 목표 중에 하나는 <최강 야구> 직관을 가는 것이다. 둘째 아이도 함께 갔으면 해서 야구에 재미를 들이게 애쓰는 중이다.
아이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웠고, 나는 이미 본 방송이지만 다시 본다. 아이가 질문하는 야구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경쟁의 의미가 뭔지 궁금해했다. 아이가 생각하는 경쟁의 의미를 들었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다. 끄덕끄덕.
나는 이날의 경기의 최고 수훈자인 이택근 선수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이택근 선수는 <최강 야구>에서 선수로 뛰기 위해 팔꿈치 수술을 했고 1년 가까이 재활을 했다. 44세의 나이에 재활에 성공해서 시즌 막판에 큰 역할을 했다. 방송에서는 이택근 선수에게 "윈터 솔저"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CG까지 그려주었다. 내가 "나이 40 넘어 수술받고 재활하고 다시 선수로 뛰는 게 쉬운 게 아니다"라고 얘기해 주니, 아이가 한마디 한다. "엄마가 나이를 많이 먹은 거구나." 이택근 선수 얘기가 왜 이리로 튀냐! "그래, 엄마 나이 먹었다!" 해놓고 웃었다. 오래된 TV 덕에 아이와 취미를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으며, 함께 웃었다.
오래되고 낡은 TV지만, 평상시에는 꺼져있는 TV지만, 그 본래의 사용법과 다르게 모니터로만 쓰이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나와 가족들에게 기쁨을 준다. 문득 내가 더 나이 들어 젊었을 때만큼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깜빡깜빡할지라도, 이 TV처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뭐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려면 지금 나는 무엇을 채워야할까 생각해본다.
오래된 TV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공연 DVD가 다시 보고 싶어진다. 얼른 글 다 쓰고 공연 영상을 봐야겠다. TV야, 네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