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렸다.
“어, 왔어?”
비록 마스크로 얼굴이 반이나 가려져 있을지언정, 만면에 가득한 웃음이 보이는 거 같았다. 창현이 형은 그런 형이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막상 만나면 웃고 있는 형. 대개 상사와 메이커라는 비즈니스로 만난 사이는 사무적인 관계로 흘러가는 게 보통이거늘, 우리는 그냥 이 험난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30대 남자로 동지애를 형성하면서 편한 형, 동생 사이로 지내게 됐다.
“어, 형님. 잘 지냈어?”
“그냥 자가 호흡하는 거에 감사하는 거지 뭐. 허허.”
드르륵.
"네, 뭘로 주문하시겠어요?"
“B코스 두 개요.”
“아, 형님, 빤한 살림에 뭔 또 B코스야.”
“에이, A라니. 우리 김 대리님 모시고 A코스 먹을 수 있나.”
싱거운 너스레를 떨면서 형은 마스크를 벗으려고 손을 귀쪽에 갖다댔다.
“어, 뭐야. 시계 새로 샀어?”
창현이형 손목에 못 보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삐까뻔쩍한 롤렉스. 묘하게 배신감이 치밀었다.
“아니, 형, 우리 같은 헝그리인 줄 알았는데 롤렉스 뭔데 이거?”
배알이 뒤틀려 님 존칭을 생략해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형은 또 사람 좋은 너털웃음부터 지었다. 그러곤 살짝 얼굴을 숙이곤 작게 속삭였다.
“짭이야, 짭. 메이드 인 광저우.”
괜시리 머쓱해졌다.
“아니, 형님, 뭔 또 짜가를 사셨수?”
다시 형에서 형님이 됐다.
“내 형편에 롤렉스를 어떻게 사. 근데 진짜 같지 않아?”
제법 테는 그럴싸하게 갖춘 듯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일모레 마흔인 형이, 그래도 누구나 이름 대면 알 만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짝퉁을 찰 거라고 생각하긴 쉽지 않았다. 하긴, 형이 결코 보통의 길을 택하는 유형의 인물은 아니지...
“그래도 형이 차니까 진짜 같네. 그나저나 요즘 계좌 상황은 어때?”
형이 뭔가를 말하려다 잠시 머뭇대더니 대뜸 스마트폰을 꺼내서 내게 건넸다.
“한번 직접 봐봐. 그래도 많이 올라왔지?”
-10% 내외. 코로나 초기 때 –30%~-40%였었는데, 확실히 많이 복구돼 있었다. 비록 아직 마이너스 상태였지만, 당시에 비하면 자신 있게 계좌를 공개할 법도 했다.
“오, 이러다 곧 양전하겠네. 역시 우리 형 잘하네.”
형이 또 뒤로 고개를 젖히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잘하긴 뭘 잘해. 아직 멀었지 뭐. 그나저나 곱버스 손절했어? 걱정돼서 연락해보려다 미안해서 연락 못 했네.”
“뭐, 처참하게 발렸지.”
“그러니까 내가 곱버스 사지 말랬잖어...”
창현이 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때마침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렸다.
“주문하신 B코스 나왔습니다.”
때마침 애피타이저가 제공되면서 자연스레 대화가 끊겼다. 둘 다 헛헛했던 터라 재잘대던 입에 음식을 채워넣기 바빴다. 형이야 그렇다손 쳐도 얻어먹는 주제에 나까지 마냥 먹기만 할 수 업는 노릇이었다.
“역시 성공한 형이 사준 거라 더 맛있네.”
나는 허기도 어느 정도 달랬겠다 휴지로 입을 대충 닦고 입을 다시 대화 용도로 변경했다.
“뭐, 지금 잠깐 돈 좀 풀었다고 발악하는 건데...”
슬쩍 창현이형의 표정을 체크했는데 걱정스러움 반, 한심스러움 반이었다.
“표정 좀 푸쇼, 형님. 곱버스는 다 팔았어.”
“이야, 용단내렸네. 잘했어. 전문가들도 당분간 계속 오를 거래. 이제야 밥 좀 편하게 먹겠네.”
창현이형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때마침 메인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형은 음식을 직접 아주머니로부터 받아서 내가 먹기 편한 쪽으로 놓기 시작했다.
“그럼 주식은 이제 손 완전히 뗀 거야?”
갑자기 입이 근질거렸다.
“형, 엔피스라고 들어봤어?”
“엔피스, 못 들어봤는데, 뭐 있어?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음료 이름 같기도 하고...”
“그건 쿨피스고 형님. 아무튼 엔피스라고 있는데, 이건 다른 데 가서 누설하지 말고 형만 아셔야 돼.”
순간 형의 눈이 반짝였다. 방에 둘밖에 없었는데도 형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도 덩달아 밀실 분위기 연출에 일조했다.
“형님, 형, 형. 문, 문 열려있어.”
어느새 형님은 다시 형이 됐고, 형은 드르륵, 미닫이 문을 굳게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