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난중일기 (5)
매수는 신중하게, 매도는 신속하게
‘8시 59분.’
호흡을 가다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위치를 재정비했다. 개장을 앞두고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지난주부터 개장 이후 나는 곱버스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매도 실현으로 확정 손실액이 찍힐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그간 곯아터진 속이 후련해 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아쉽기도 한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곱버스에게는 이제 이별을 고해야 했다.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건 새로운 만남. 매도를 통해 예수금이 확보되는 대로 나는 엔피스 매수에 나섰다. 그다지 변동성이 큰 종목은 아니어서 매수 타이밍을 잡는 데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개장 언저리에 매수 희망가에 원하는 수량을 대놓고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체결돼 있는 식이었다. 아무튼 야금야금 망할 곱버스를 팔아서 차곡차곡 흥할 엔피스를 사는 거. 그게 내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퇴근 이후엔 집에 돌아와 엔피스라는 회사를 스터디했다. 시총이 500억 정도밖에 안 되는 중소 규모의 회사라 그다지 자료가 많진 않아 애를 먹었다. 그래도 공시된 자료뿐만 아니라 종목 게시판까지 몇 년 치를 소급해서 샅샅이 조사한 결과, 회사가 돈은 없는데 기술력은 꽤 보유하고 있었다.
'엔피스, 자율주행 관련 솔루션 및 자동차 전장 개발업체'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전자회사인 KL전자에 납품 실적도 있었다. 현재 매출 규모나 수익성만 보지 않고 미래 먹거리와 성장성을 고려하면 분명 현재의 시총 및 주가는 저평가된 걸로 보였다. 특히 자율주행 테마는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핫하다고 할 수 있는 테슬라가 주도하고 있는 만큼, 엔피스도 이목만 좀 집중되면 비약적 상승도 가능해 보였다.
“휴. 여기까지는 한번 날아갈 법도 한데.”
서점에서 사온 주식 관련 서적과 블로그 등을 참고해서 내 딴에 밸류에이션을 한번 해보았다. 거품이 잘 나는 입욕제를 몇 스푼 가미한 셈법으로 계산해 보니,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그간의 손실을 메꾸는 걸 넘어 수입차 한 대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렇게 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이리저리 뒤척대다 이내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엔피스 종목 게시판에 들어갔다. 딱히 새롭게 올라온 글은 없었다. 전형적인 소외주의 특징이었으나, 오히려 이런 종목이 한번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오르기 마련.
‘까짓것 내가 하나 남기지 뭐.’
나는 로그인을 해서 희망찬 글을 하나 남기고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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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같은 오늘이 계속 이어졌다.
다만, 거래량이 많지 않아 곱버스를 매도한 예수금의 크기만큼 엔피스를 사는 건 쉽지 않았다. 다만, 일주일 넘게 지켜보다 보니 한 가지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전에는 음봉으로 시작해 종가는 꼭 말아 올려서 양봉으로 끝낸다는 거. 다소 인위적인 느낌이 짙었고,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해서 시세를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같은 일개 개미는 그들이 만들어 내는 조류에 몸을 맡기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물살을 거스르지 않고 2주 정도 열심히 따라갔다. 그러다 보니 목표 수량도 채워졌고, 어쩌다 보니 수익성도 10% 남짓이 됐다. 슬슬 자신감이 붙었고 종목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진작 그 망할 곱버스에서 하차할 걸.’
지난 두어 달 두렵기만 했던 9시가 기다려졌고, 시퍼렇게 물들어서 볼 때마다 가슴을 멍들게 한 계좌는 이제 볼 때마다 오장육부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약속의 3시엔 어김없이 반갑기 그지없는 세력 형님들이 당도해 호가를 올려놓곤 했다. 음봉을 양봉으로 바꿔놓는 양봉업자들. 차트에 빨간 양봉이 끈적끈적 꿀로 이어져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씁쓸하게만 느껴졌던 아메리카노조차 캐러멜 마키아토처럼 느껴질 정도의 달달함을 선사한달까. 갑자기 커피 한 잔이 당겼다.
[선배님, 커피 한 잔 어떠신지요?]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한동안 연락이 뜸해져 버린 송 선배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곳간이 넉넉해지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어, 좋지. 로비에서 볼까?]
내심 걱정했는데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선배의 따듯한 답변에 무거웠던 마음의 짐이 경감됐다. 주머니가 무거워진 만큼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로비로 가는 발걸음도 경쾌했다.
“선배님!”
“오, 주신아! 오랜만이네!”
간만에 호명 되니 뭔가 좀 어색했다. 대개 친구들은 성하고 이름의 앞글자만 붙여서 ‘김주’라고 불렀고, 회사에서는 주로 성과 직급으로 불려서 이름은 잊고 살았건만...
“예, 선배님, 그간 본의 아니게 격조했습니다.”
“그래. 잘 지냈냐? 전번에 주식 제대로 시작한다더니 이름대로 주신(株神)이 됐니?”
불현듯 당시 선배 앞에서 펼쳤던 포부가 떠오르면서 낯이 화끈해졌다.
“주식의 신이 아니라, 주접의 신이 됐습니다...”
가벼운 농지거리에 선배가 한바탕 껄껄 웃었다. 주로 내가 웃기고 선배는 웃는 역할이었는데, 선배 특유의 호방한 너털웃음과 당당한 풍채의 조화가 나로 하여금 더 웃기게 만들고 싶게끔 했다.
“그러니까 나랑 부동산 하자니까.”
선배는 일찍부터 부동산에 관심을 기울여 은행 다니는 형수랑 의기투합해 제법 자산을 불리는 데 성공했다. 물론 운도 많이 따라준 케이스였지만 그것도 실력이었다.
“예, 그 부동산 자금 만들어 보려고 주식 시작했다 아주 호되게 두들겨 맞았네요. 그래도 요즈음 좀 회복 중입니다.”
“오, 그래? 뭐 있어?”
선배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대며 관심을 보였다.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그게 말이죠, 엔피스라고 있는데요...”
어느새 경청하기 위해 내 편으로 몸을 기울인 선배... 엔피스 떳다 방이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