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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oche Oct 04. 2024

신난중일기 (4)

하나둘씩 작전을 실행해 볼까

‘커피나 한 잔 ㄱㄱ?’     


컴퓨터 화면 우측 하단이 반짝였다. 사내 메신저 알림이었고, 발신자는 예상대로 재원이었다. 지갑이 가벼워지니 마음은 무거워져 사내 메신저를 꺼놓거나 커피타임 오퍼가 와도 바쁘다며 거절하기 일쑤였는데, 재원이만큼은 예외였다.     


‘ㅇㅇ 엘베 앞 ㄱ’     


재원이는 나랑 같은 부서였다. 나이는 동갑이고 입사는 나보다 2년 정도 늦었다. 지방 현장에서 근무하다 서울로 올라온 지 1,2년 남짓밖에 안 됐는데도 서글서글한 인상과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두루두루 원만하게 지냈다. 나도 몇 번 어울리다 그냥 편하게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 대개 저런 유형이 무색무취에 재미는 없는 경우가 많은데 재원이는 예외였다. 얼핏 착실하기만한 마지메(まじめ)처럼 보였지만, 조금 친해지다 보면 자기 색깔도 있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인기가 많았다. 급기야 최근엔 옆 부서 신 대리와 깜짝 결혼 발표 후 일사천리로 식까지 올려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문이 닫힙니다.”     


엘리베이터 안내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닫힘 버튼을 짜증스레 연신 두들겨댔다. 덕분에 같이 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불청객과의 동승은 피할 수 있었다.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어,어”하는 당황스러운 목소리와 종종대는 발걸음 소리만 간신히 새어 들어왔다.     


“요즈음 계속 안 좋지?”     


주어도 목적어도 생략된 문장이었지만, 이해하는 데 문제는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재원이는 내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불과 두어 달 전에 내가 이 대한민국은 망했다며 곱버스 매수를 강력 추천했었기 때문. 다행히 결혼하느라 여윳돈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재원이까지 같이 탑승했으면... 지금 생각해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대목이었다. 아무튼 나는 짐짓 웃으며 답했다. 


“말해 뭐해, 곧 있으면 한강 갈 판이지 뭐.”

“에이, 뭔 한강 타령이야. 돈이야 아직 젊은데 다시 벌면 되지.”     


아무래도 동갑내기에 정서도 비슷하다 보니 재원이는 내가 고충을 토로하면 힘든 부분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특히 차가운 머리로만 하는 이해가 아니라 따듯한 가슴으로 공감해주는 걸 빼먹지 않아서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최적의 대화 상대였다. 나에게는 지금 위로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적임자가 바로 옆에 있었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준비됐습니다!”

“내가 갈게!”     


나는 재빨리 진동벨을 들고 픽업대로 향했다. 얻어먹는 자의 도리였다. 혹시 또 괜히 허겁지겁 덤벙대다 쏟을까 싶어 트레이가 아닌 한 손에 한 잔씩 꼭 쥐고 자리로 돌아왔다. 차가운 컵에 손이 시렸지만 마음은 더 시렸다.     


“재원이가 사준 거라 더 맛있네.”     


사실 예전엔 고소한 맛이 좋아서 주로 라떼를 먹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주로 얻어먹는 처지로 전락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보다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먹게 됐다. 처음엔 맛이 씁쓸한 게 그다지 탐탁지 않았지만, 먹다 보니 인생의 쓴맛을 가르쳐주는 거 같기도 하고 라떼보다 먹고 난 후 입안이 개운해서 이제는 오히려 라떼보다 아메리카노를 더 선호하게 됐다. 지금 당면한 쓰디쓴 현실도 곧 익숙해지고 답답한 속도 개운해질는지...     


“얼마나 물려있는 거여?”

“한 5천 정도... 현기차랑 이마트 손절한 것까지 포함하면 더 되겠네. 현기차로 치면 그랜저 풀옵션 한 대 날렸지 뭐.”     


둘은 동시에 말없이 아메리카노를 흡입했다.

"씁, 쓰르."

빨대를 투과하는 아메리카노 소리조차 씁쓸하게 들렸다.      


재원이가 다시 말문을 뗐다.

“혹시 엔피스라는 종목 들어봤어?”

“엔피스? 우리나라 종목이야?”

반문과 동시에 검색에 들어갔다. 코스닥에 상장돼 있는데 뭔가 심상찮은 냄새가 풍겼다.     


“어, 자율주행 관련주인데 관심종목에 넣어놓고 한번 봐봐.”

“왜 뭐 있어?”

재원이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아니, 건너 아는 선배들 몇 명이 부띠끄 운영하는데 이번에 이거 올린다고 해서... 100프로 확실한 건 아니니까 혹시 보다가 괜찮다 싶으면 조금만 사는 것도 괜찮을 듯.”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재원이가 아니었다. 


“형들 말로는 쩐주가 그 KL전자 둘째 아들인데...”     

갑자기 곱버스에 대한 애증이 엔지스에 대한 설렘으로 바뀌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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