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 본연의 모순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스스로 내재하며, 그 누구보다 훌륭히 구현해낼 수 있는 배우. 이게 바로 배우로서의 이병헌을 대한민국 최고로 꼽는 이유요, 결정적 대목이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한 감정적 반발은 도처에서 답지하리라. 그러나 그럴싸한 이성적 논박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는 결국 인간 이병헌이 탁월한 배우로서의 요건을 두루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 이병헌과 배우 이병헌에 대한 평가가 상반될 수도 있다는 진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는 그만큼 역설적이다.
아버지가 그린 이병헌
# 변화무쌍한 팔색조, 더 높은 곳을 향한 비상
촌스럽지만 미소가 싱그러운 풋풋한 선생님부터 세련된 수트를 갖춰 입은 도회지의 고독한 히트맨, 풍자와 해학을 일삼는 유쾌한 광대에서 역모의 불안에 몸서리치는 예민한 왕, 평생 한 여자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사는 로맨틱한 남자에서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 잔을 꿈꾸는 건달까지. 이쯤 되면 수행 가능한 역할의 스펙트럼과 구사함에 있어 매번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송강호, 최민식, 김윤석, 설경구 등 소위 연기 지존으로 불리는 여느 다른 배우조차 넘볼 수 없는 전인미답의 경지로,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는 더해가고 격차는 벌어지는 듯 보인다.
이렇듯 그가 팔색조로 훨훨 비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천부적인 연기력에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돼서겠지만, 선악이 공존하는 그의 얼굴 또한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해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는 꽤 독특하게 생겼다. 눈 코 입 모두 비대칭이고, 이목구비 선은 비교적 가늘면서 또렷한 데 반해 얼굴 윤곽의 선은 굉장히 굵으면서 뚜렷하다. 더 나아가 얼굴 골격은 키가 클 거 같은데 반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자는 바로 이 부분, 바로 그의 각진 턱과 크지 않은 신장을 그의 단점으로 지목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또한 그가 대배우로 우뚝 서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조화로움에서 당연히 비롯되는 아름다움보다 때로는 약간의 부조화가 빚어내는 하모니의 미학적 가치가 더 크기 때문. 불협화음의 조화라는 재즈의 선율이 화음으로 점철된 클래시컬 뮤직보다 때로는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과 비슷한 이유랄까.
비대칭과 부조화는 그가 미소 지을 적에 비로소 심미적 아름다움을 완성해낸다. 상이 잘 맺히는 특유의 깊은 눈빛, 날렵한 콧날, 한쪽 입술이 살짝 올라간 큰 입 모두가 어우러져 오묘한 조화를 이뤄내 정석에 입각한 여느 미남들을 압도하는 모종의 아우라를 발산하는 것. 이 앙상블은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농염해지는 느낌인데, 미남과 거인들의 본고장인 할리우드에서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는 것도 동일선상에서 설명할 수 있다. 심지어 <황야의 7인>을 리메이크한 <더 매그니피센트 7>과 전설 반열에 오른 배우들과 함께 했던 작품(레드2, 미스컨덕트)에서조차 한 치의 위축됨 없이 돋보일 정도. 오히려 존재감에 있어서만큼은 동양인이라는 유일무이한 특수성까지 더해져 그들을 압도하는 느낌마저 자아낸다.
# 복수의, 복수에 의한, 복수를 위한
그렇다면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류하는 파토스는 무엇일까? 누구보다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역을 넘나들어왔던 만큼 하나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복수'가 그의 연기 도정을 가장 잘 대변하는 정념이 아닐성싶다.
감정의 총체인 그의 눈에는 다양한 온갖 파토스가 서려있다.
서사의 전개에 있어 갈등 국면은 불가결의 요소인 바, 복수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가장 흥미롭고 흡인력 있는 이야기 소재로 자리매김해왔다. 작중에서 프로타고니스트로서의 역할을 완성도 높게 수행함과 더불어 안타고니스트와의 첨예한 대립을 통해 극에 긴장감과 재미요소를 부여하는 능력만으로도 이병헌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뿐만 아니라 복수의 기저에 자리한 복잡다단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냄은 물론,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구현함에 있어서도 단순한 재현이 아닌 주체적 해석을 가미함으로써 관람자의 감정을 참여시키고 때로는 절정의 카타르시스로 이르게까지 한다. 이제 충무로에서 이병헌을 주연으로 캐스팅한다는 건, 흥행몰이를 할 주연급 스타를 기용한다는 식의 단순 구색 갖추기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 것.
그럼 그가 가진 이러한 특장점을 가장 잘 알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감독은 누구일까?비록 최근 인랑으로 고배를 마셨지만 김지운 감독이 그 주인공. 이병헌은 김지운의 페르소나라고 불릴만큼 그의 작품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개봉 당시보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한국 느와르의 보배로 재평가받는 <달콤한인생>을 비롯해 영화 플롯보다는 각각의 캐릭터 자체에 무게를 둔 <놈.놈.놈.>, 최민식, 아니 희대의 싸이코패스 장경철과의 인상적인 격돌로 인해 두고두고 회자되는 <악마를보았다>까지. 물론 이에 앞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오늘날 이병헌이라는 거목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병헌이라는 브랜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최근에도 일각의 우려와 달리 미스터션샤인에서 분한 유진초이라는 캐릭터 또한 그가 구사할 수 있는 다양한 감정선들이 적절히 얽히고설키면면서 대중의 구미를 맞추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앞서 청소년관람불가로는 공전의 히트를 친 <내부자들>의 안상구 또한 동일 연장선상에서 해석 가능하다. 하지만 그 모든 캐릭터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는 건 그가 상황에 맞춰 선보이는 변주에 기인한다. 탄탄한 기본을 토대로 연주되는 만큼 결코 겉돌거나 어색함이 없다. 어쨌거나 이병헌은 이병헌이기 때문. 누가 그랬듯 클라스는 영원하다.
미스터션샤인에서 유진초이로 분해 호연을 펼치면서 대중들의 우려를 불식시킨 이병헌.
# 배우로서 이룩해온 것들, 그리고 남은 무언가
최근 남산의 부장들이 크랭크인했다. 이병헌이 분하게 될 김규평은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인물.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했던 대목인 데다 이성민, 곽도원까지 가세한다니 이정도면 가히 어벤저스급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도 그의 필모그래피에 또 한 편의 대표작이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배우는 단순한 모델이 아니기 때문에 잘생기고 못생기고 여부가 크게 관계가 있는 직업은 아니다. 물론 잘생기면 개인적으로 좋겠지만 그것보다도 느낌이 있어야 한다. 희로애락 그밖의 디테일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얼굴 가진 사람을 '배우 얼굴 가졌다고 한다'고 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좋다"
천생 배우의 얼굴을 지닌 이병헌, 결국엔 대중들을 설득해내고야 마는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