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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oche Aug 04. 2019

[내 인생의 노래] '지금 이 순간', 순간이 영원으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中 <지금 이 순간>

# 순간이 영원이 되는 자리에서 부르고 싶은 노    


“내 결혼식 축가는 꼭 네가 해줬으면 좋겠어.”


같은 부서에서 동고동락했던 동료이자, 철모르고 까불던 후배를 항상 따듯하게 감싸주고 격려해주던 멘토, 그리고 항상 소녀 같은 어여쁜 모습으로 뭇 남성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던 선배의 진심 어린 부탁. 그래서 비록 그 어떤 무대보다도 더욱 떨리고 부담되는 자리가 결혼식 축가지만 나는 흔연히 예스로 답했다. 그리고 뭘 부를까, 이런저런 곡들을 물망에 올리던 차, 결국 ‘지금 이 순간’을 부르기로 했다.    


# ‘지금 이 순간’ 노래 그 이상의 의미    


우리나라에 뮤지컬 열풍을 몰고 오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노래. 뮤지컬 배우는 물론, 많은 남자 가수들이 한 번쯤은 무대에서 불러봤거나 꼭 한번 불러보고 싶은 뮤지컬 넘버. 이렇듯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Jekyll and Hyde)’의 대표 수록곡인 ‘지금 이 순간’(원제 'This is the moment')을 수식하는 표현은 다양하고도 화려하다.


극 중 ‘헨리 지킬’이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꿈이 이뤄지기를 고대하면서 지금 이 순간이 의심할 것 없이 자기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 역설(力說)하는 노래로, 뮤지컬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들 극의 클라이맥스에 나오리라고 생각하나 오히려 극의 초중반에 등장한다. 이야기의 배경인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함과 그 이면에 숨겨진 어두움의 공존이 환기하는 신비로움, 그리고 서정적이면서도 극적인 멜로디 라인으로 듣는 이와 부르는 이 모두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역작이자 뮤지컬 역사에 길이 남을 수작이다. 사실 극의 전체적 작품성보다는 이 한 곡이 보유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런 까닭으로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 곡을 거쳐 갔다. 먼저 전 세계적으로 1997년 초대 지킬로 열연했던 ‘로버트 쿠치올리’(Robert Cuccioli), 뮤지컬계의 모차르트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남자라 할 수 있는 ‘마이클 볼’(Michael Ball), 호주가 배출한 글로벌 뮤지컬 스타 ‘앤소니 왈로우’(Anthony Warlow), 우리나라에서는 조지킬이라는 대명사를 만들어낸 조승우, 폭풍 가창력으로 청중을 매료시키는 홍광호 등 내로라하는 뮤지컬 배우뿐만 아니라 김범수, 김연우 등 다른 장르의 가수들도 커버한 바 있다. 얘긴즉슨,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누군가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이 곡에 잊지 못할 추억이 잔뜩 서려 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이 불렀음에도 불구, 아직도 매번 부를 때마다 설레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단, 한 번도 대충 부른 적이 없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이 담겨 있어 이제 단순한 애창곡이라기보다는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힘이 돼준 일종의 주제가랄까. 뭐, 이 곡을 부르고 난 뒤의 지킬 박사의 최후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지지만 말이다.

    
# 또 다른 추억을 아로새기다    


“다음은 신랑 신부를 위한 축가 순서입니다.”


축가를 앞두고 혼자 앞줄에 앉아있을 때면 매번 가슴이 쿵쾅거린다. 몇 번 경험해봤으니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어떻게 매번 예외가 없다. 할 수 있는 건 생수나 홀짝대면서 호명되기 직전까지 ‘지금, 지금’ 거리며 첫 음을 잡는 것뿐. 짐짓 긴장하지 않은 척 힘차게 앞으로 걸어나갔으나 마이크를 받아든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리고 마주한 신랑 신부. 이 둘에게 지금 이 순간은 어쩌면 평생 기억될지도 모른다. 다시 가슴이 두근댔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말로는 뭐라 할 수 없는 이 순간...”    


첫 소절을 간신히 마치고 신랑 신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등골로 소름이 돋았다. 저를 바라보는 신랑 신부의 눈빛엔 행복감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확신이 가득했다. 이 둘의 앞길을 축복하는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 두근거리던 가슴이 감격으로 젖어 들었고,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을 ‘지금 이 순간’에 선사한 채 무대를 내려올 수 있었다.    


# 순간에 영원을 부여하는 추억의 오선지    


“음악을 왜 좋아하냐고?”    


음악은 내게 있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장(場)이다. 작곡가와 연주자, 그리고 그 음악이 환기하는 기억의 편린 속 자리한 그리운 얼굴들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 위로 넘실대는 수많은 사람과의 교감이 자아내는 행복한 시절이 켜켜이 더해진 추억의 오선지가 내겐 음악이다. 때때로 아침에 들은 멜로디가 온종일 귓가에 자분거리는 통에 조금 성가실 때도 있지만 그래도 무미건조한 일상을 윤택하게 가꿔주는 인생의 반려로서 음악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음악과 함께 한 시간에 감사하고, 앞으로 함께 할 시간에 설렘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축가는 항상 떨린다. 지금 이 순간이 저 둘에게는 영원이 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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