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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연못 Apr 28. 2024

봄의 대곡선

24년 4월 25일


오전 12시 38분

달을 보며 누웠다. 달 주변에는 처녀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인 스피카가 작게 빛나고 있다. 고개를 살짝 위로 젖히자 목동자리의 아크루투스가 크고 밝게 빛나고 있다.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 중에서 시리우스와 카노푸스 다음으로 세 번째로 가장 밝은 별이다. 그러니 이 계절 속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밝은 별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봄의 대곡선을 이루는 세 개의 별 중에서 두 개의 별인 스피카와 아크루투스를 보니 봄과 여름의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제 오후 12시쯤에도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는데 아침에 커튼을 젖혔을 때만 해도 아파트 단지 안을  감싸고 있던 흐린 먹구름이 사라지고 크고 새하얀 구름과 가벼운 햇살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새의 깃털처럼 섬세하게 갈라진 구름의 모서리가 서로 겹쳐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창백한 흰 구름이 하늘을 거의 다 가리고 있어 하늘의 푸른 부분은 아파트 옥상 끝부분에 조각천처럼 붙어 있었다. 맑고 투명한 안갯속에 누워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앞을 볼 수 없어 불안에 떨게 하는 안개가 아니라 숲 속의 나무를 습기로 덧칠하는 듯한 안개, 내가 들어가 있는 풍경 속을 더 깊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안개였다.


이번에는 달과 별 그리고 구름과 하늘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슬프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보고 그 탄생의 복잡함과 형형색색의 빛을 견디지 못하고 도저히 삼킬 수 없어 죽음을 떠올렸던 잔인하고 위태로운 봄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 여름이 되면 바다에서는 내 몸보다 큰 물결이 발목을 적시고 걸어가는 길에는 녹음이 펼쳐질 것이다. 봄의 아름다움이 끝나가는 흔적과 여름의 아름다움이 시작되는 순간이 섞인  이 미묘하고 특별한 시기는 내게 부드러운 밤을 준다.



24년 4월 26일


오전 12시 48분

오늘은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무것도 읽지 않으려 했다. 12시 정각에 불을 끄고 누웠지만 책을 잡아들어 펼쳐서 눈으로 글자를 읽어 들이지 않았으며 손으로 펜을 잡고 글자를 쓰지 않았다는 게 불편했다. 결국 다시 일어나 발코니에 누워 글을 쓰고 있다.


아침에는 꽤나 희망적이었다. 그동안 쓴 시 중에서 여덟 편을 골라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치며 옮겨 적고 약간의 수정을 한 후 인쇄했다. 신인상 응모작 신청서를 작성해서 원고와 함께 우체국으로 가지고 가 익일특급 우편으로 신인상 담당자 앞으로 보냈다. 우편봉투에 주소를 쓸 때는 약간의 불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편접수를 할 때만 해도 내가 쓴 글을 투고한다는 행위 자체에 기쁨과 떨림이 있었다. 하지만 우체국에서 나오는 순간 예고도 없이 내 머리를 때리는 햇빛에 당황하고,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며 뇌 주름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느낌에 시달렸다. 인쇄한 원고를 스테이플러나 서류용 클립으로 묶어놓지 않고 그대로 우편봉투에 넣어 보내버렸다는 것, 찾아내지 못한 오타가 많이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 시를 보기 좋게 정렬하지 못했다는 것, 내 글은 심사위원이 보기에 읽을 가치도 없는 것일 거라는 생각에 무기력해졌다.

 

집에 돌아와서도 끊임없이 그런 생각에 빠져들어 고양이가 곁에 다가와 관심을 가져달라며 쳐다보고 가늘게 울며 보채는 소리에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차갑고 깊은 갯벌 속에 몸통 절반이 빠진 것 같았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밤이 깊어가는 것을 느끼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뭐라도 먹고 싶었고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쌀을 씻고 밥을 안치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청소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고 버리는 과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울면서 손에 쥔 것이나 눈에 보이는 걸 던지며 주저앉고 싶어질 거 같았다.


집에서 가까운 초밥집에 들어가 연어초밥과 스테이크초밥을 주문했지만 연어에서는 물비린 맛만 났고 스테이크는 힘줄이 질겨서 씹다가 삼킬 수가 없어 뱉어버렸다. 그래도 주문한 음식이 아까워 억지로 먹다 보니 울컥해져서 음식을 대부분 남긴 채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송진가루와 건조한 날씨로 까슬까슬해진 손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화상회의용 프로그램으로 음악기초이론 수업을 30분 동안 들었다. 수업은 짧았지만 음악을 깊이 느끼고 전문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알 수 있는 지식들을 배울 수 있었다.


퇴근을 하고 온 그는 혼자 씻을 수가 없어 내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주사를 맞은 부위에 호두처럼 큰 염증이 생겨 병원에 가서 농을 빼고 온 후라 상처부위가 감염되지 않도록 소독을 하고 물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바로 욕실로 들어가 그를 씻겨주었다. 머리부터 감기고 그다음에는 몸. 특히 손과 겨드랑이와 발을 더 깨끗하게 씻겼다.


다른 출판사 공모전에도 응모하기 위해 아침에 컴퓨터 문서로 옮겨놓았던 시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교정하고 신청서, 개인정보 동의서와 원고를 서류용 클립으로 묶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을 하고 청소를 한 후에 30분 동안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신 후에 바로 우체국으로 가서 원고를 보내야겠다. 당선되지 않아도 글은 계속 쓸 것이다.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어도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늘어나고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된다. 여기 내가 살아 있다고. 내가 살아온 삶과 내가 살아가는 삶을.


달은 구름에 희미하게 가려져 있지만 밝게 빛나고 있다. 구름이 흩어진 자리와 달 주변의 하늘은 회색빛과 초록빛이 섞여 있다. 인적이 드문 곳의 오래된 연못의 수면 같은 색이다. 하늘에도 연못이 있고 연못 속에서는 새와 별 그리고 구름이 살고 있다. 나는 그 수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 모습은 비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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