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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로윈 Mar 14. 2019

브뤼셀에선 디자이너를 조심하세요

내 여행만 왜 이래? - 벨기에 (1)

아름다운 도시 브뤼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딱 하나만 빼고.


“안녕하세요, 혹시 영어를 할 줄 아시면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숙소에서 그랑플라스를 향해 한적한 거리를 혼자 걸어가던 내 옆에 자동차 한 대가 멈추었다. 대머리에 빨간색 뿔테 안경을 쓰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있던 남자 운전자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대머리 디자이너로 출연한 캐릭터와 너무나 닮은 인상이어서, 누구라도 패션 쪽 종사자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똑같았다. 정말로.


    종이 지도를 보고 길을 헤매고 있던 그가 길을 물어서 나는 구글 맵을 이용하여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는 나를 대화 속으로 이끌었다.






    “길을 가르쳐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 혹시 패션에 관심이 있나요? 오늘 옷차림을 보니까, 옷을 입는 센스는 있는데, 오늘 운동화 색깔이 조금 아쉽네요. 다른 색깔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디자이너이기 때문이에요.”      


    이탈리아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를 사용하며 그가 말했다.      


    “당신은 지금 보니 키가 이 정도, 몸무게는 이 정도 되죠?”  


    그는 나의 키와 몸무게를 정확하게 맞췄다.  


    “저는 주로 ARMANI와 MAX MARA 두 브랜드에 디자이너로 소속되어 있고, 지금은 브뤼셀에 있는 패션쇼에 참가했다가 밀라노로 돌아가는 길이랍니다. 브뤼셀은 처음이라 길을 몰랐는데 당신을 만나서 참 행운이네요, 당신은 좋은 사람 같아요.”


    나는 칭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유명한 브랜드의 디자이너를 길을 가다 만나다니, 오늘 하루 시작이 좋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길을 가르쳐 준 보답으로 패션쇼에 사용했던 샘플 옷을 당신에게 선물해도 괜찮을까요? 여기 가죽 재킷은 당신 사이즈에 맞을 거예요.”     




Mont des arts, Brussels


    나는 생각했다. ‘대박이다! 이런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을 거니까 꼭 붙잡아야겠다.’ 그는 종이 가방 안에서 비닐에 쌓여 있는 가죽 재킷은 굉장히 섬세한 제품이니 조심히 다루어 달라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가방을 품에 안은 나는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 나에게 건넨 재킷은 여기 자신의 포트폴리오에도 있다면서 디자이너는 주섬주섬 포트폴리오북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에도 그와 나는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니, 몇 년 전 패션위크 때 한국에서 머물렀는데, 한국 호텔의 카지노는 별로였다느니 등등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덧붙여서 그는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그와 굉장히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재킷을 공짜로 받아서 그렇게 느꼈던 것이지만)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그가 나에게 선물을 하나 더 주겠다고 했다. 역시 자신이 디자인한 샘플 여성 가방인데, 악어가죽으로 된 것이라고 했다.      


    “당신의 어머니나 여자 형제에게 선물하면 좋을 거예요. 시중에서는 비싸게 팔리는 제품이라서, 아무리 샘플이라도 아무에게나 주지는 않아요, 당신이 좋은 사람이고 내 친구라고 생각해서 드리는 거니까 소중하게 다루어 주세요.”      


    나는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르는 지경이었다. 도대체 길 가다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비싼 선물을 한 번에 많이 받아도 되는지. 그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가 말을 꺼냈다.    


  “미안하지만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뭐든 말씀하세요.”     


    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부탁을 말했다.      


    “이런 부탁을 하기도 민망하지만, 내가 어제 카지노에서 돈을 많이 잃었는데, 하필 오늘 일요일이라 은행에서 돈을 송금받을 수 없는 상황이네요. 밀라노까지 운전해서 가야 하는데 기름값이 없어요. 뭐 그 정도 돈이야 지금 메고 있는 넥타이 하나를 팔아도 나오는 돈이지만, 명색이 디자이너라 체면이 있어서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밤의 그랑플라스


    그의 부탁은 기름값에 해당하는 돈을 하루만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이기에 빌려줄 수 있는 돈이 크지 않다고 그에게 미안해하며 말했다. 우선 얼마인지라도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함께 차를 타고 근처의 주유소로 갔다. 그가 밀라노까지 어느 정도의 기름이 필요하다고 말을 해주었고 리터당 금액으로 계산해보니 400유로 가까이 되는 금액이 나왔다. 나에게는 너무도 큰 금액이었다.       

    

    “너무 큰 금액이라 빌려줄 수 없고, 지금 통장에서 인출할 수 있는 돈이 300유로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내가 말하자,     


    “그럼 300유로만이라도 빌려주면, 이탈리아까지는 갈 수 있으니 이탈리아에서는 지인이 많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럼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래요?”     


    내가 물어보자 그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지금 이메일과 계좌를 적어주면 월요일인 내일 바로 송금을 해 주겠으며, 자신의 연락처는 여기 지금 주는 명함에 다 적혀있으니 여기로 연락만 하면 해결된다고. 그는 명함을 내 선물이 들어있는 종이가방에 넣겠다고 했다. 명함을 보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돈을 빌려 주기로 결심했다. 내가 이 만큼 선물도 받았는데, 돈을 거저 주어도 모자랄 판에 빌려주는 것도 하지 못하면 너무 미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좋아요. ATM으로 갑시다.”     


    그렇게 나는 ATM에서 300유로를 인출해서 그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정말 고맙다며 나에게 이탈리아식으로 볼에 뽀뽀를 하고, 나중에 밀라노에 올 일이 있으면 자기 집에서 공짜로 숙식을 제공할테니 언제든지 연락만 주라며 격한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와 헤어지고 난 후, 가죽 재킷과 악어가죽 가방을 들고 지하철역 한구석에 앉아서 그가 준 명함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종이가방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명함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명함을 가방에 넣었다고 했는데. 지하철역까지 오는 동안 명함이 빠졌나 생각이 들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살펴보았다. 그래도 없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꺼림칙한 느낌이 조금씩 발목부터 몸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혹시? 아닐 거야. 그는 좋은 사람이었어. 비싼 옷과 가방을 공짜로 주는 좋은 사람.      


    선물로 받았던 종이가방에서 가죽 재킷과 가방을 조심스레 꺼내보았다. 가죽을 구별하는 눈은 없었지만, 가죽 재킷은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고급스럽지가 않은 디자인과 재질이었다. 가방도 악어가죽이라기엔 지나치게 반짝거렸다. 비로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망했구나.’         



    다음 이야기는 <사기 후에 오는 것들>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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