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시집 감상문
밴쿠버 중앙일보
김한나 작가의 <글을 써야 사는 여자>에 대한 기고/[한나의 시간] 세상에 뿌려지는 詩 한 호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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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나의 호흡’이라고 시인이 고백할 때 그의 얼굴에 빛이 스친다. 글이 당신의 ‘생명줄’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시가 된 한 사람의 삶이 반갑고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이내 ‘글이 나의 구원’이 된 시간을 떠올리며 우리의 같을법한 마음을 가만히 대어 본다. 이민 1.5세로 혼돈과 그리움을 토해낸 듯한 나의 수필과 일렁이는 삶의 파도에 흔들리며 지은 이민 1세의 시가 맞닿아 있다.
삶의 희로애락을 시로 낳은 임현숙 시인의 첫 시집 <글을 써야 사는 여자>가 내 손에 있다. 첫 책이 담고 있는 설렘과 용기, 수줍음과 뿌듯함도 함께 받으니 뭉클하다. 글을 쓰며 살아온 내게 보낸 두툼한 편지 같다. 1세들이 캐나다에 옮겨왔던 나이가 되어보니 당신들이 궁금하다. 더 나은 삶을 찾아온 이 땅에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낯선 언어가 삶을 비집고 들어올 때 호되게 휘둘리기도 녹록지 않은 타국의 인심에 남몰래 눈시울을 적셨을 것이다. 고국에 두고 온 부모 형제자매가 그리워 물리적 거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까지.
/잔소리쟁이 작은언니/ 막내 요리는 눈도 즐겁다던 큰오빠/그림처럼 앉아 받기만 하던 손위 시누이도/ 기억 속에 고대로인데/ 언젠가 다시 만날 명절에는/ 하나둘 먼 길 떠나/ 빈자리에 귀에 익은 목소리만 희미하겠다// 명치에 박제된 그날의 군상/ 돌아가고 싶은 우리 자리//
-「설날 풍경 한 점」
어느 날, 태평양을 건너지 못해 사랑하는 이를 멀리서 떠나보내며 눈물 흘리는 시인이 그려진다.
/삐걱대는 음에 키득거리던 못난 아우들을/ 발그레 웃으며 바라보던/ 큰 오라버니는/ 다시 들을 수 없는 울림을 남기고/ 먼 길 떠나셨다/ 내 어릴 적에 예쁜 막내라고/ 친구 모임에 손잡고 다니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도 못해 부앙부앙 울었다// - 「부앙부앙 울었다」
그렇게 여럿을 보내고 휑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잠시 기억을 잃었던 내 엄마의 모습과도 겹친다.
시인은 각편마다 시를 쓴 날짜를 새겨 놓았다. 시의 ‘첫 마음’을 기억하려는 애틋한 노력이다. 그렇게 ‘들숨의 하루를 글로 날숨 하며’ 인생의 풍랑을 이겨냈으리라. 그리운 날, 절망스러운 날에도 놓지 않는 생명 같은 시. 어떤 날에도 품위를 지켜주는 문학. 시인에게 시는 제 숨을 쉬며 자신으로 사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시인이 밴쿠버에서 글벗들과 글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본다. ‘아름시벗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시가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넋 놓고 있고 싶은 날/ 그런 날엔 내게 타이른다/ 산다는 건 낡은 추억을 깁는 게 아니라/ 싱싱한 추억거리를 짓는 거라고// - 「그런 날에는」
그는 함께 추억거리를 지어 시로 적고 읽으며 삶을 이루고, 어떤 시는 선율을 엮어 노래로 부른다.
언젠가 시인이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가슴 떨리는 설렘을 간직하고 싶다고. 그 바람대로 「푸른 계절엔」 마을 휘돌아온 꽃바람으로 여전히 그녀의 가슴이 흔들린다. 마음 몽글몽글해지는 시를 읽으며 나는 글이 우리를 이끈 곳을 바라본다. 내 안에 있었지만 있는 줄 몰랐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토록 찾았지만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열망의 장소.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아름다운 나라. 그곳에서 시인은 나목(裸木)이 되어 영혼마저 벌거벗고 시를 쓰며 속삭인다.
“내 안에 있는 시는 내 생의 봄날입니다.
해넘이 곶에 이를 때까지 서정의 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이제 생의 봄날이 된 그녀의 시가 당신의 세상에 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