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이글거리는 듯한 붉은 빛깔이 밤하늘을 수놓더니 어느새 보랏빛으로 변합니다. 빛의 마술로 불리는 오로라입니다. 주로 극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최근 유럽 대부분 국가와 미국 등 위도 40도 인근 지역에서도 관측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태양 흑점 활동이 활발해 예년에 비해 훨씬 자주, 넓은 지역에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라틴어로 '새벽'이라는 뜻을 가진 오로라. 자연이 선물한 경이로운 빛의 향연이 인류를 매혹시키고 있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18일 어제 전국적으로 내린 봄비에 55억 원이 넘는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국토교통부는 이번 비로 전국 17개 다목적댐에 적게는 4㎜에서 많게는 55㎜의 빗물이 모여 물 1,000여 톤이 유입됐다고 밝혔습니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래 봄비, 어젠 오랜만에 비가 내렸지. 나 어릴 땐 비가 그렇게 지겨웠는데.
때릉때릉. 아버지는 비만 내리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포구 망원동. 작고 낡은 우리 집.
혹시 한강물이 넘쳐 잠기진 않았는지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갔을 아버지.
“아빠 어디야! 물 넘칠라 하는데 엄마는 아직 식당에서 안 오고, 누나도 시험 준비한다고 친구네 갔다 안 왔단 말이야.”
“경수야, 좀 기다리라. 여기 양화대교 근처니까 금방 갈끼다.”
(우리 집엔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아버지는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손님, 영등포역 도착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할아버지는 83년 돼지띠인 내가 굶어 죽진 않을 거라 했다. 그래서인지 굶어 죽진 않는다.
이렇게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어릴 땐 ‘엄마! 백 원만’ 했었는데, 이젠 내가 엄마에게 쌀 팔 돈을 준다.
이혼한 누나가 맡기고 간 조카와 강아지도 이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기억난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
나는 막둥이, 귀염둥이였고, 아빠가 사 온 별사탕 라면땅을 양손에 들고 팔짝팔짝 뛰었지.
지금은 내가 맛동산 하나 들고 간다 치면 조카는 괴성을 지르고 멍멍이도 덩달아 폴짝 인다.
작은 집이 웃음으로 꽉 찬다.
뚜루루루. 핸드폰이 울린다. ‘바보 엄마’다.
“아들, 오늘은 별일 없지. 힘들지 않구? 엄마가 항상 미안해, 너 장가도 못 보내고. 오늘 아빠 기일인데 언제쯤 들어오나 해서. 누나는 일 있어서 못 온다네.”
“응. 조금 있다가 들어갈 거야.”
(어디냐고 물어보는 말에, 나 양화대교, 양화대교. 엄마,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좀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국가의 작용은 본래가 차별이다.
정의의 본질로 대변되는 평등이란 것도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것이어서, 다르다면 같게 취급할 수 없다는 거니까.
산술적 평등이 공동체주의적 배분의 원칙에 따라 수정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욕망을 가진 현실 속의 인간들이 타인과 크게 다름에도 같게 취급당하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
또한 모든 국민에겐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지만, 인간다운 생활이란 그 말 자체가 추상적이고 나라마다 제 각각이어서, 입법부나 정부로서는 표구 액자에 써놓은 행위지침으로 삼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만약. 내게 해갈의 단비를 내리게 하는 비범한 능력이 있다면...
다른 것은 달리 취급해야 하니 국가는 나에게 55억 원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큰 금액을 제안할 수도 있겠지. 그때 난 그 대신 다른 소원을 들어달라고 얘기할 것이다.
내 엄마, 그리고 조카만이라도 행복하게 해 달라고.
하지만 이는 꿈 속의 이야기일 뿐, 내게 비를 조절하거나 다른 사람의 행복을 영구 보장할 능력은 전혀 없다. 비참하다기 보단... 그게 현실이다.
Suum Cuique! 각자에게 그의 몫대로!
그래서 행복 또한 받아들이기 나름. 흙탕물 속에 연꽃이 될수도 있단걸...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난 지금 아버지가 건너던 그 다리를 건너고 있다.
뿌연 황사를 봄비가 씻어주어서인지 선유도에 깔린 노을빛이 찬란하다.
이 순간, 형형 색깔 노을은 나를 위해 춤추는 오로라.
강과 산, 자동차와 기차, 작은 집과 큰 집을 모두 다 감싸 안고 나를 보듬는 치유의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