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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小說 법학개론 (下)

(2012년 6월 25일 칼럼 기고분)

by 임상구 변호사

(지난 호에 이어서)



#6. 용기


수업 끝나고 서연은 승민에게 ‘지난 중간고사 때 시험족보 복사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나 어려울 때 도와줄 거지.’ 하면서 자신이 직접 녹음하였다는 음악 CD 1장을 건네주었다.

한쪽씩 나누어 낀 이어폰에선 ‘G선상의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서연의 이러한 행동들과 말은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

나의 감정은 내 스스로 속일 수 없다.

반면 상대방의 감정이 어떠한지는 ‘나와의 관계를 둘러싼 여러 가지 간접사실, 정황사실’로 그 진정한 의사를 추론해 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섣부른 의사 추단은 금물이다. 내 예상이 깨질 때 크나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승민은 용기 내어 그동안 미루었던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다만, 집주소를 모르니 음대 1학년 우편함에 꽂아두었다.


승민은 자신의 편지가 서연에게 도달되었는지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다.

일단 편지가 우편함에 보관됨으로써 객관적으로 도달되었지만, 요지 가능 상태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승민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서연과 만났지만 서연은 편지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음대 우편함에 꽂힌 수북한 우편물 중에서 승민의 편지가 분실되었을 확률은 높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7. 어리석은 이별


‘널 사랑한다’는 의사표시와 ‘나도 널 사랑한다’는 명시적․묵시적 의사표시가 합치되어 ‘연인’이라는 관계를 만든다.

연인관계는 자유와 구속의 양면성을 갖는다.
어루만지는가 하면 할퀸다.
구름 위로 올라갔다가 깊은 바다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는다.


승민은 현재 같은 로펌 동료 변호사와 3개월 뒤 결혼을 앞두고 있다.

예비 장인 또한 유명한 법조인인데, 그에 비하면 자신의 부모는 평범하여 움츠려 들기 일쑤다.

서연과의 관계도 그랬다.

서연과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하던, ‘그 잘난 압구정동 과선배’에 비하면 승민은 자기 자신이 초라했다.

그래서 서연과 카사노바 선배형이 그렇고 그런 사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배신감에 보기도 싫었다.

그 후로 승민은 서연의 연락을 받지 않았고 자신을 찾아온 서연에게 CD를 돌려주며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행복했던 시절 둘이서 꼭 만나기로 약속했던 ‘첫눈 오던 날’, 승민은 논산훈련소에 있었다.

기나 긴 상념 속에 눈을 맞으며 야간행군을 하고 있었다.

눈물이 나려 했다.



#8. 그때 그 마음


서연의 남편을 위해서 열심히 변호했다.

예상대로 ‘수지’라는 여자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실형 3년 6월. 만족은 아니더라도 예상 가능한 최저치에 속한다.

서연이 찾아왔다.

남편과 수지라는 여자와의 관계, 서연도 나름 짐작했던 모양이다.

4년의 결혼기간 동안 아이는 없었다. 구속되기 얼마 전 남편은 자신에게 널 위한 거라며 이혼도장 찍자고 했단다. 서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


“아버지 사시던 제주도로 내려갈 거야. 결혼 축하해.”

서연이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가는데 서연의 서류뭉치에서 편지 하나가 떨어졌다.

도달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던 그때 그 편지...



#9. Sein


15년 전 교수님은 자인(Sein; be, 사실, 존재)과 졸렌(Sollen; must, 규범, 당위)은 세상을 보는 두 가지 틀이라 말했다.

하지만, 사랑엔 자인(Sein)만이 현실이고 진실이며 당위 그 자체다.


승민은 오랜만에 대학 교정을 찾았다.

둘이서 자주 앉았던 벚나무 그늘 아래, 가로등 켜진 그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둘이서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에 음악 한 곡을 신청한다.

연습 없던 풋내기 첫사랑. 이제는 기쁨이나 눈물 없이 담담하고 아련하게 들리는 그 음악을 서연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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