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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小說 법학개론 (上)

(2012년 6월 25일 칼럼 기고분)

by 임상구 변호사

내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는... 잘 아는 친구 ‘승민’이 내게 들려준 것이다.

얼마 전 그 친구는 나와 <건축학개론> 영화 얘기를 나누던 중,

나에게 "대학 1학년 때 만났던 첫사랑 ‘서연’을 최근에 다시 보게 되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너도 서연이 아니? 법학개론 같이 듣던 타과 전공생이었는데..."




#1. 예약 완결


서연은 음대를 졸업한 다음 아나운서를 준비하다가 5살 많은 사업가를 만나 결혼했다.

법대생이었던 승민은 변호사 4년 차로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과 연애에 지쳐있었다.


어느 날 젊은 여성고객이 승민이 일하는 로펌으로 승민을 찾고 있다. '누구지?'

서연이었다. 자기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무리하게 돈을 끌어 썼던 결과 수십 억대 사기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는데 그 일을 맡아달란다. 대학 다닐 때 승민이 서연에게 ‘어려운 일 생기면 도와준다’고 약속했고, 서연은 그 예약금으로 자신이 여러 곡을 직접 녹음한 CD를 승민에게 건네주었으므로 자신에게 예약 완결권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승민은 ‘계약내용이 특정되지도 않았고 시효나 제척기간도 지났다’는 등의 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사건을 맡지 않겠다고 했으나 선임 변호사는 ‘네 실적이 저조하니 진행하라’고 한다.


그 음악 CD 기억난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듯한 ‘G선상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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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법학개론 첫 시간


15년 전 봄, 승민은 법학개론 첫 강의를 듣고 있다.

지난밤 학과 선배들과 과음하는 바람에 머리가 띵하여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중, 삐걱하고 뒷문으로 들어오는 한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천천히 앉을 곳을 찾더니 승민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승민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교수님은 칠판에 둥그런 원을 그리고 계셨다.

제군들, 이게 뭘로 보이나? 거기 지각한 여학생 답해보게.


그녀가 머뭇거리며 답한다.

“태양?...” <나머지 학생들 숨죽임>

“그럼, 훌라후프?...” <나머지 학생들 몇몇 키득거림>

“그렇다면 법학개론 시간이니까 포승줄?” <나머지 학생들 대부분 크게 웃음>


교수님이 말을 이어간다.

"다 맞다. 하지만, 내가 그린 것은 바로 새의 알이다.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와 같다. 신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을 품고 알이 깨지는 고통도 감당해 보길 바란다.

물론 ‘법학’도 하나의 알이자 세계다. 부화하지 못한 ‘법학’은 그저 ‘밥학’에 지나지 않는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나? 대학에 들어왔으니 공부도, 사랑도 마음껏 해보고... 1교시는 이만."


승민은 교수님이 2교시에서 말씀하시는 ‘아프락사스’니 하는 것이 무슨 얘긴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았다.


“교수님이 하는 얘기 ‘데미안’ 맞죠? 그 책 어렵던데...”

옆자리 그녀가 승민에게 말을 걸어왔다. 승민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3. 접견


승민은 서연의 의뢰에 따라 선임계를 내고 검찰에서 사건기록을 등사하여 기록 검토를 시작했다.

피해자가 여러 명이고 금융거래내역까지 첨부되다 보니 기록이 수 천 페이지에 이른다.


약간은 안타까운 사건이기도 하다.

제법 좋은 아이템으로 시행사업을 하려다가 자금이 딸리자 투자자들을 모아 ‘곧바로 사업이 성사된다’고 거짓말하여 돈을 빌리고, 빌린 돈으로는 사무실 경비대고 인허가 로비한다고 흥청망청 쓰다가 급기야 손실을 메꾼다고 카지노 출입에 선물투자까지 하는 바람에 남의 돈까지 고스란히 털린 케이스다.

물론 어딘가로 빼놓은 돈의 흔적도 있는 듯하다.


그런데, 기록에 이상한 점이 있다.

서연의 이름은 전혀 없고, 낯선 여자의 이름 ‘수지’가 자주 거론되는데 금융거래내역상으로도 거액의 돈이 오가고 있다. 논리와 경험칙에 따르면 내연녀인 것으로 아주 강력하게 ‘사실상 추정’된다.

‘서연아, 이러고 살았니? 이런 놈인 줄도 모르고 변론해달라고 나에게 사건을 맡겼니?’


다음 날 서울구치소에 접견신청서를 내고 서연의 남편을 접견했다.

멀쩡하니 호인 스타일이었으나 물어보는 질문들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서연의 남편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집사람한테 가족들과 상의해서 선임해달고 했는데, 변호사님 계신 로펌에는 전관 변호사님도 계시지요? 구치소에서 들어보니 제 담당 재판부 형량이 엄청 쎄다던데, 얼마나 살아야 할까요? 어차피 잘 하려고 했던 거라 무죄 주장하면 안 될까요?”

승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피해액이 커서 최소한 3~4년 이상은 봐야 될 것 같고, 무죄 주장했다가 오히려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괘씸죄로 형량이 늘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부탁 한 가지를 들어달란다.

“부탁이 있는데 010-1234-××××번으로 연락해서 면회 좀 꼭 와달라고 전해주세요.”

그 사람이 애타게 찾는 사람의 전화번호는 서연의 것이 아니었다.



#4. 벚꽃 날리던 날


법학개론 수업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승민과 서연은 두 차례 같은 토론 조로 묶여 인사를 나누었다.

더욱이 신기한 것은 교정을 오가는 길에 서연과 ‘자주’ 마주친다는 것이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고, 승민을 보고 잠깐 눈인사를 했다.

그러면 옆에 있던 친구가 뭔가를 묻는 듯했고, 서연은 환하게 웃기만 했다.


벚꽃이 날리던 4월 어느 밤, 승민은 절친 납득이를 포장마차로 불러내 30분 동안 말을 빙빙 돌리다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털어놓는다.

‘운명... 인 것... 같다. 나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납득이는 ‘하하, 우리 승민이 다~ 컸네.’하며 승민을 부둥켜안는다.


20171014_143126.png 영화 <건축학개론> 의 한 장면


#5. 보내지 못한 편지


중간고사 끝나고 첫 번째 법학개론 시간, 교수님은 ‘표시주의’와 ‘의사주의’를 설명하신다.


법학하면 수많은 학설, 판례가 떠오르는데, 대부분의 학설은 크게 객관설, 주관설, 절충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내심의 의사는 표현되지 않는 한 그 상대방이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원칙적으로 '객관설에 입각한 표시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계약의 해석도 마찬가지여서 일단 표시된 문언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고 문언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을 때 절충설적 입장에서 당사자의 진의를 고려하게 될 뿐이다.

'의사표시 도달시기'에 대해서도 학설이 갈리는데, 일정한 의사표시가 상대방의 지배영역(우편함, 대리수령자 등)에게 전달된 다음 상대방이 사회통념상 그 내용을 인식할 수 있는 요지(了知)가능 상태에 놓여야 한다는 ‘객관주의적 절충설’이 통설이다.


승민은 생각한다.


‘표시되지 않은 내 마음, 서연에게 아직까지 보내지 못한 편지는 무의미한 걸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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