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사랑 실패한 예술 끝나지 않은 모험

무민보다 더 사랑스러웠던 <토베 얀손>의 10년

by 홍화일

어느 순간부턴가 생활 디자인 곳곳에 스며든 통통하고 하얀 트롤.


토베 얀손을 알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처음 본 무민이 귀여웠다. 하지만 일본 캐릭터라면 굳이 소비하고 싶지 않았고 늦기 전에 검색을 했다. 하마인 줄 알았던 무민이 북유럽 설화에 나오는 트롤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전까지 트롤은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로만 접했기 때문에 좀 충격이었던 기억이 난다.


동글동글하면서도 삐죽빼죽한 캐릭터들이 눈길을 끌기도 하지만, 마음이 설렌 건 이들의 이야기를 좀더 알고 나서다.

여행을 떠난 친구 스너프킨을 기다리는 무민의 뒷모습, 펜선이 겹겹이 쌓인 섬세하고 어두운 배경,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도 다정한 무민은 그 생김새보다도 더 간지러웠다.

만화 영상이라도 찾아볼까 싶었는데 일일이 찾아볼 부지런함이 없었기도 하거니와 어쩌다 작가가 무민의 출판을 꺼렸다는 얘기를 읽었다. 갑자기 동화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 듯했다. 나는 알고 싶지 않은 그 너머 어른들의 사정. 곧 흥미가 바스러졌다. 그렇게 무민도 토베 얀손도 잊고 살다 영화로 다시 만났다.


토베 얀손은 성장 영화 같은 전기 영화다.


"이런 건 예술이 아니야."


예술가가 아니면 동정받는 집안에서 토베는 자신 또한 순수 예술가로 성공을 희망한다. 그런데 정작 언제나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붓이 아닌 펜이다.

아버지와의 갈등, 2차 전쟁의 폭격, 연애와 사랑, 토베의 삶에 영향을 미친 모든 순간에 무민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는 만화는 단순한 돈벌이로 치부할 뿐 자신을 만화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성공이 보이는 편한 길을 두고 왜 저렇게까지 고집을 세우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속으로조차 그 말을 차마 못 내뱉는 것은 나 또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잘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해 본 일이 한번쯤은 있었기 때문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아버지의 기대치, 경제적 어려움,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 뭘 해야 할지 모를 막연함. 여성과 남성을 동시에 사귀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토베의 10년은 언뜻 굉장히 특이해 보이지만, 은근한 공감대가 있다.


영화에서는 낯선 핀란드의 모습을 낮은 채도로 보여주지만 차가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토베가 기쁘든 슬프든, 성공할 때든 실패할 때든 화면은 토베의 얼굴을 가까이서 관찰한다. 영화를 더 따뜻하게 만드는 얼굴이다.

애인과 특이한 말투로 서로를 부르고, 엄격했던 아버지의 비밀스런 다정함을 뒤늦게 알게 되고, 확신이 없는 얼굴로도 정신없이 박자를 밟으며 춤을 추고. 영화는 내내 따뜻했다.


무민이 큰 성공을 이룬 뒤에도 토베는 스스로를 실패한 예술가로 지칭하고, 10년간 벗어나지 못한 사랑에는 결국 토베 스스로 끝을 찍는다.

그리고 토베는 다시 새로운 사랑과 예술을 시작한다.

망해버린 그의 모험에 함께하기가 즐거웠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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