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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푸근 Feb 20. 2019

30대 중반에게 결혼이란

어둠 속의 대화에서 찾은 나의 심정

친척 누나에게 전화가 온 것은 겨울 어느 날이었다. 늘 단도직입적인 그녀는 용건부터 시작했다.

"응 난데, 서현이 좀 데리고 가서 놀다 와."

나는 여러 번 조카 서현이에 대한 글을 썼다. 사촌누나의 딸로서 어린 도도함을 보유한 그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덕분에, 나는 서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더구나 해외에서 엔지니어 생활을 하는 매형의 부재로 난 늘 그녀의 엔터테인먼트를 담당해야 했다.


서현이는 초등학생 치고는 욕심이 많았다. 공부도 잘하고 싶어 했고, 발레도 열심히 했다. 나와 함께 했었던 몇 번의 미술관 관람으로 미술까지 배우게 된 그녀는 직장인인 나보다 바빠 보이곤 했다.

"서현아, 안 힘들어?"

"재밌어요. 삼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보려고요."

이 이야기를 들은 나의 어머니는 드디어 집안에 찰 돌멩이 같은 녀석이 나왔다며, 너무 익어버린 참외 같은, 물러 터진 아들을 우회적으로 비난하셨다. 그렇게 서현이는 한해 한해 많은 학원을 다녔고 드디어 방전이 되어버렸던 것 같았다.

"자꾸 지쳐하니까, 네가 데리고 나가서 바람 좀 쐬게 해 줘. 그래도 삼촌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잖아."

그랬다. 우린 서로 많은 것을 공유했다. 나의 연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곰팡이(절친)를 제외하고는 서현이 밖에 없었다. 이 초등학생은 가끔씩 촌철살인의 조언을 하곤 했는데, 꽤나 유용하고 유익한 조언에 스스로 놀라곤 했다. 나는 바로 서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딩(애칭), 삼촌이랑 놀러 가자."

"어디요?"

"어둠 속으로."



Vivian Maier


어둠 속의 대화라는 문화공간을 소개해준 것은 회사의 한 후배였다.

"선배님 , 한번 가보세요. 어둠 속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데 신선하더라고요."

연애도 하지 않는 여유 가득한 삶에서 나는 가능하면 서현이에게 많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공부가 전부인 세상에서 벗어나, 많은 가능성이 열어주고 싶었다. 서현이는 무엇을 망설이냐는 듯 바로 승낙을 했고, 우리는 그렇게 주말에 안국역으로 향했다.


어둠 속의 대화는 한 문화공간 건물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대별로 정해진 인원들이 들어가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나는 특정 시간을 선택 후 2장을 구매했었다. 10분이라는 여유를 남기고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뭔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현이와 나를 제외하면 3팀의 커플이 옹기종기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꿀이 떨어지고 별빛들이 교환되는 대기장소에서 나는 서현이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처량하게 기다렸다.

"삼촌, 다 커플이에요. 으흐흐."

평소 도도하기 짝이 없고 잘 웃지도 않는 이 녀석은 유독 이런 상황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럽게 웃었다.

"그렇네, 처참한 심정이야. 빨리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으흐흐."

"너 민준이 앞에서도 이렇게 웃으면 안 돼."

민준이는 서현이가 좋아하는 학교의 남자아이였다. 서현이는 순식간에 도도한 여인으로 돌아왔다.

"평소에는 이렇게 안 웃거든요!"

서현이의 분노가 일어난 그 시기에 진행요원의 집합 요청이 들렸다.


"자, 모두 한 줄로 서주세요. 아 죄송한데요. 아버님?"

난 순간적으로 우리 아버지가 뒤에 오신 줄 알았다.

"저요?"

"네, 따님하고 오신 아버님... 아니신가... 어머... 죄송해요."

난 시작부터 어둠의 악마가 날 휘감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에요...(서러움) 삼촌입니다.(TMI)"

"(관심 없다는 듯) 저 안은 정말 어두워서 안경 벗으셔도 됩니다. 가끔씩 안경이 부딪혀서 위험하거든요."

나는 순간 망설여졌다. 친한 지인과 학교, 회사 선후배들은 공통적으로 내게 했던 조언이 생각났던 탓이기 때문이다.


절대 안경 벗지 마.

나사로 고정할 수 있으면 얼굴에 달아놔 그냥.

뭐하는 짓이야. 어서 안경 써. 예의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안경은 내 외모의 전부이자 얼마 되지 않는 살림이었다. 그래서 망설이는 나를 보며 서현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삼촌, 괜찮아요. 안경 벗어도 나쁘지 않아요."

나는 서현이의 말에 용기를 얻고 안경을 락커에 넣어놨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암흑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암흑 속에서 진행하는 분이 따로 대기 중이었고, 세 커플과 한 개의 삼촌-조카팀은 일렬로 서서 그를 기다렸다. 진행요원은 성시경 같은 목소리로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이번 진행요원을 맡은 홍길동(가칭)이라고 합니다."

그는 정말 성시경 같은 꿀성대를 가진 남성이었다. 마치 '잘 자요'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노곤해지기까지 했다.

"자, 우린 총 4팀입니다. 첫 번째 팀은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진행요원은 커플들에게 얼마나 만났는지, 이곳이 끝나면 어디를 갈지 등 능수능란하게 질문을 했고, 다들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우리 팀 차례가 되었다.

"두분도 커플이신가요?"

"아뇨. 삼촌과 조카입니다."

"와, 특별한 팀인데요. 조카분, 삼촌하고 오니까 좋아요?"



"(도도하게) 네, 재밌어요."

서현이는 평소처럼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삼촌은 어떤 분이에요?"

서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삼촌은 재밌어요. 저한테 이것저것 많이 보여주고 알려주세요."

"좋은 삼촌이네요. 삼촌 결혼했어요?"

"아뇨. 으흐흐흐."

나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녀석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났던 것일까? 미궁에 빠진 생각을 뒤로하고 우리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특정한 지역을 찾아가기 위해 벽을 더듬었고, 청각과 후각 등을 사용하여 평소 익숙했던 물건들을 맞추기도 했다. 서현이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맞히는 모습에 나는 은근히 기뻤다.


Vivian Maier


그렇게 우리는 1시간 반 가까이 어둠 속을 여행했고 마지막 시간에 도착했다.

"여러분, 이제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종이와 펜이 앞에 있으니 서로에게 편지를 써보세요."

나는 순간 고민이 되었다. 무슨 말로 서현이를 응원해야 할까. 친척 누나의 과도한 교육열로 방전이 된 아이, 그럼에도 힘들다 말하지 않는 초등학생에게 나는 이렇게 썼다.


다음엔 민준이랑 와. 바보같이 웃어도 좋아할 거야.


우리는 그렇게 어둠의 대화를 끝냈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까의 궁금증이 생각나 서현이에게 물었다.

"근데 서딩아, 아까 왜 웃은 거야. 나 결혼 안 했다고 하고."

"엄마가 삼촌이 김건모처럼 될 거라는 게 생각났어요."

사촌누나이지만 원수 같은 여성이기도 했던 그녀는 내게 항상 직설적이었다. 어찌 보면 많아지는 내 나이에 대해 나보다 더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늘 참견과 간섭이 심했는데,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서현이에게도 비난을 쏟아냈었나 보다.

"근데, 삼촌 왜 결혼 안 해요?"

나는 이렇게 수없이 받았던 이 질문을 다시 받았다. 이 어린아이에게 '응,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게도 최후는 자존심은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또 술술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연애에 대해 에너지가 떨어지는 것 같아. 예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열정이 넘쳤었는지 놀라울 때도 있어. 요즘은 만남에 소극적이고, 쉽게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아, 이 사람은 나랑 아니라고 쉽게 단정 짓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반복되는 만남에 지치게 돼. 어느 순간 아무런 감성도 인연도 없는 현실에 서있는 날 발견하게 되는 거야."


서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티라미수를 한 그릇 다 먹으면서 고뇌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에게도 내가 큰 숙제인지도 모르겠다.'

서현이는 해답을 찾았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그럼, 에너지를 찾게 해주는 언니를 만나요."

"(당황하며) 그분이 어딨는데?"

서현이는 또다시 바보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몰라요. 으흐흐흐."


우리는 그렇게 경복궁 주변을 배외하며 한동안 산책을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서현이가 적어준 쪽지를 열어보았다. 쪽지에는 서현이가 어둠 속에서 도도하게 쓴 글씨가 담겨있었다.


삼촌, 다음엔 꼭 좋은 분이랑 오세요.

안경도 꼭 쓰세요.



https://youtu.be/mQ055hHdxbE

John Mayer, New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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