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의 소통방식
회사업무로 정신없던 어느 날이었다. 주변의 간부들이 분주해진 것을 느끼면서 나는 불안한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하필 금요일이었다. 또 갑작스러운 지시로 주말출근을 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몇 분후 부장님은 우리부서 전체를 회의실로 소집했다.
"음.. CEO가 30분 뒤에 우리 층을 방문하신다고 한다. 다들 책상 정리 좀 하고, 오실 때까지 왠만하면 자리에 있도록 하자."
늘 그랬듯이 부장님은 짧고 간단하게 지시를 하고 회의실을 나가셨다. 문제는 항상 그 뒤 시작되는 2인자의 일장연설이었다. J차장은 전쟁을 앞둔 장교처럼 우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자, 모두 자리에 있는 쓰레기통도 깨끗하게 비우고, 그 김사원은 가서 캐비넷 정리부터 시작해."
회의실에 있던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다소 술렁이기 시작했다. CEO는 지금 무엇을 훔치러 오는 것이 아니었다. 쓰레기통은 왜 비워야하며 죄없는 김사원은 왜 닫혀있는 캐비넷을 정리해야하는 걸까? 나는 또다시 답답스러운 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대리급 이하에게 CEO는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본 적도 거의 없고, 들리는 이야기는 대부분 안 좋기만 했다. 나는 밥을 먹으러 나갔을 때 가끔 고급식당으로 들어가는 CEO를 보곤 했는데, 꽤나 좋은 식당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좀 데려가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끝내고 싶었던 금요일 오전을 번거롭게하는 그의 등장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CEO를 기다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나는 보통의 어느 날처럼 업무로 정신이 없었다. 이곳 저곳에서 걸러오는 전화들은 내게 CEO의 방문을 쉽게 잊어버리게 했다. 그 때였다. J 차장은 닌자처럼 갑자기 등뒤에서 나타났다.
"최주임, 가서 나무에 물 좀 줘라. 나무가 저게 뭐야. 힘없이."
슬슬 그의 오바가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CEO가 온다니 나무에 물까지 주라는 그의 말에 난 바쁜 와중에도 머그컵에 물을 떠서 나무에게로 갔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나무에게 혼잣말을 했다.
"나무야. CEO 온데. 너도 정신 차려야지."
그 때 뒤를 지나던 내 동기가 그 소리를 듣고는 킥킥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오빠, 그 쪽도 난리야? 우리 부장님은 내 미니언스 인형을 서랍에 넣으라고 하셨어. 뭐지 이 분위기."
"그러니까 다스베이더라도 오는가보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30분이 좀 지나자 부장님의 다급한 지시가 떨어졌다.
"CEO께서 바로 대회의실로 오신다고 하니 모두 출발하자. 늦으면 안돼."
우리는 그렇게 대회의실에 들어가서 CEO가 오길 기다렸다. 거의 다 도착했다던 CEO는 낮은 포복으로 오시는지 20분이 지난 후에야 도착했다.
그의 등장은 화려했다. 일단 회의실의 문이 누군가에 의해 열렸다. 그리고는 우리 부장님과 옆 부서 부장님께서 먼저 문 앞으로 들어오셨다. 두 부장님은 호위무사처럼 문 양쪽에 섰다. 그리고는 멋적게 웃으며 들어오는 CEO가 보였다. 그는 키가 작았지만 정말 독하게 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내 명령을 거역한다면 광선검으로 널 응징하겠다는 듯한 눈빛은 내게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걸치고 온 코트를 한 간부에게 주고서는 연단 앞에 섰다.
"아, 모두들 반가워요. 오늘 이같이 직원들과의 대화를 갖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나는 기분이 좋은 것은 너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자제하고 그의 말에 집중해보려 했다. 그는 이런저런 의미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프랑스 국적의 내 동료를 보고 살짝 당황하기 시작했다.
"오, 외국인 직원도 있었구만. 그럼 영어를 좀 섞어 써야겠구만. 하하핫."
프랑스 국적의 그 친구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한국인과 결혼한 대리였다. 그래서 무척 한국말을 잘 했다. 몇 일전 나와 굴국밥을 먹으며 '아, 드디어 속이 풀리네' 라고 했던 사람인데, CEO는 그를 신경쓰며 이상한 문장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우리의 사고가 너무 닫혀있다 생각이 들어요. 투 클로즈드(too closed). 일부 경영부서에서는 항상 해왔던 해결책만 내어 놓습니다. 에브리데이 세임띵스 데이 브로트(everyday same things they brought) 그래서.."
나는 알파고가 요즘 뜬다더니 어학사전도 인공지능으로 나왔나 싶었다. 완벽한 영작을 할 수 없었지만, 조목조목 단어를 정확하게 변환하는 그의 임기응변은 신기할 정도였다. 그때 나의 프랑스 동료는 손을 들며 말했다.
"사장님, 저 한국어 잘 합니다. 그냥 하셔도 다 알아듣습니다."
CEO는 살짝 당황하였지만 연륜을 보이며 맞받아쳤다.
"젊은 친구가 아주 적응력이 좋구만."
벌써 십년동안 한국에서 산 친구였다. CEO는 세상의 짐을 덜었다는 듯이 말을 계속 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부조리한 업무방식을 탈피해야 한다고 주창했던 것 같다. 본인이 몸소 부조리한 소통방식을 직접 하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20분 정도가 지나갔다. 나는 주말에 누굴 만날까 하는 딴생각을 했었고, 일부 동료도 다르지 않은 듯 하품을 하거나 핸드폰을 몰래 보고 있었다. 그 때 CEO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내 동기가 잠시 졸다가 CEO에게 발각이 된 이후 상황을 무척 난감하게 이어졌다.
"자네 졸고 있나?"
내 동기는 눈을 번쩍 뜨더니 변명을 시작했다.
"아닙니다. 잠깐 멈추고 왔던 업무를 좀 생각했습니다."
외국에서 석사까지 하고 온 내 동기의 임기응변은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이후 그는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다' 는 세간의 평을 듣기 시작한다. 아무튼 그의 변명에 CEO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 이런 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해요. 기존에 해오던 것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자네는 점심 먹을때 부장들과 같이 오게나."
급기야 CEO에게 점심초대까지 받은 내 친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를 비롯한 나머지 동기들은 참으로 좋은 식사가 될거라며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CEO는 그 이후 향후 회사의 미래에 대한 모호한 청사진을 제시한 후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그럼 질문할 사람들은 질문해보게나."
영화 <신세계>의 황정민처럼 들어올테면 드루와 라는 그의 발언에 모두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전혀 궁금한 것이 없었다. 굳이 해야한다면 이 프로그램의 잔여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도였다. 아무도 선뜻 질문이 하지 않자, 먼저 당황한 것은 부장급 고위간부들이었다. 그래서 그 중 한 부장님이 질문을 억지로 토해내기 시작하셨다.
"음.. 현재의 주니어급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십니까?"
현재의 주니어들은 궁금하지 않은 사항이었지만 이 어색함을 어떻게든 탈피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CEO는 별로 어려운 것이 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본인의 사고안에 갖혀 있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직급일 때 가장 창의적일 수 있어요. 간부들에게도 직언하십쇼. (서있던 고위간부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사고가 닫혔어요. 여러분이 이 회사에 창의적인 생각을 불어 넣을 수 있습니다."
CEO는 그렇게 동화같은 이야기를 주창하고, 다시 코트를 걸치고 퇴장했다. 그 뒤로 따라가는 수많은 간부들을 보며 저런 모습이 내 미래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J차장은 내게 다가오더니 갑작스러운 업무지시를 했다.
"오늘 CEO께서 말씀하신 내용 정리해서 알려줘. 지점에 있는 직원들에게도 공유해야지."
나는 당황했다. 거의 딴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던 나였다. 기억나는 것은 한영 단어변환과 너희 간부들은 사고가 닫혔다는 공감대가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동기들에게 핼프를 보냈고 그들은 메신저를 통해 이런저런 기억의 단편들을 공유했다. 그리고 난 2시간동안 창작의 고통을 겪으며 'CEO 말씀'을 완성했다. 그 중 한부분을 남기며 오늘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이것은 그럴싸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그러한 아우성에 불과했다.
"우리는 업무방식을 지속적으로 확장해야 합니다. 그 속에는 창의력을 바탕으로 업무효율에 대한 개선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간부들의 경험을 토대로한 새로운 프로세스 수립도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속가능한 경영개선을 위해 매진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