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상치 못했던 아군
구정의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고민을 시작했다. 곧 친척들이 몰려올 것이고 또다시 청문회가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나의 결혼을 추궁하며 대동 단결할 것이고, 별 도움이 되지 않는 Action Plan을 도출할 것이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밤 평소 좋아하던 9살 조카 서현이와 도피계획을 세웠다.
지난밤 나는 시크한 서현이의 카톡을 받았다.
"삼촌, 내일 마카롱 사줘요."
마치 마카롱을 꿔주기라도 한 듯한 그녀의 문자를 보고 나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미혼인 나에게 서현이는 친딸 같은 느낌이었다. 또한 우리는 가까이 사는 거리적 특성 때문에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서현이가 장차 지성 가득하고 모던한 여성으로 자라기를 바랐다. 그래서 미술, 음악, 영화 등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는 불필요할 만큼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고, 가끔은 또 다른 교육의 일환으로 별다방에 데려가기도 했다. 나는 처음 서현이와 별다방에 갔을 때 장소에 대해 가볍게 소개를 해주었다.
"나중에 서현이가 대학 가면 돈을 쏟아부을지도 모르는 곳이야."
서현이는 특히나 라즈베리 마카롱을 좋아했다. 평소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에서 마카롱과 함께 피어나는 미소는 내게 소소한 행복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우리는 몇 번의 별다방 만남을 가졌고, 구정에도 서현이와 그렇게 또 다른 도피를 꿈꿨다.
처음 집에 도착한 것은 메뚜기 매형과 친척 누나였다. 메뚜기 매형은 파드득거리며 인사를 한 후 소파에 앉아 내게 시비를 걸었다.
"처남, 이제 모두 포기한 건가?"
나는 정말 메뚜기 매형을 싫어했다. 그는 결혼 직후 술에 취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처남, 솔직히 내가 아깝지 않아? 자네 누나는 땡잡은 거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부한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객관적 시력의 소유자라면(눈알이 있다면) 누구나 우리 누나를 아까워했다. 하지만 한 달을 굶은, 대성하기 전 유재석을 닮은 매형은 술에 취한 나머지 내게 망언을 했던 것이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속으로 욕을 하며 참고 말았지만, 지금도 매형을 보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거울을 좀 봐.'
하지만 내 마음의 소리는 바깥으로 내보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적대적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 메뚜기는 계속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자네 누나가 걱정이 많아. 뭐 이것저것 기다릴 게 없어. 다 살다 보면 똑같은 거야. 그냥 괜찮아 보이면 잡아."
가판대의 참외 고르듯 결혼하라는 조언을 하는 메뚜기 매형의 말을 나는 대꾸도 안 하고 계속 TV만 봤다. TV에서는 '나는 자연인이다'가 방송되고 있었는데 매형의 말보다 훨씬 유익해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친척들은 합체로봇들이 하나로 완성되듯 모이기 시작했다. 구정에 펼쳐진 그들의 주옥같은 조언들을 몇 개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혹시 말이야.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소개팅을 이제 안 한다고 해서 형이 선물로 듀오 가입해줄게."
"인마, 이 동치미는 시간이 지나면 맛이라도 깊어지지만 너는 아니야. 그냥 썩는 거야."
참으로 좋은 친척들의 폭격을 받으며 멘탈이 극한 상황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벨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는 젊은 여자의 모습에서 나는 심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31살의 내 사촌동생이었다. 그러자 상황은 극변 하기 시작했다. 수리영역에서 안 풀리는 문제는 뒤로 남겨두고 쉬운 문제를 먼저 풀 듯이, 친척들은 그녀에게 온갖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현재 연애 중이었다. 취업을 준비 중인 남자 친구와 4년을 사귄 그녀에게 모두의 기대는 컸다. 이제는 가야 한다는 조언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친척들은 남자친구 사진을 보여달라고 농성하듯 말했다. 그녀는 사진 선택에 굉장히 신중한 모습이었다. 사진에 빛이 들어갔다는 둥, 이 사진엔 다른 사람들이 있어 안된다는 둥 엄격한 심사를 거쳤다. 그리고 보여준 사진들을 돌려보며 친척들은 감상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험란한 인생을 살아오신 이모님의 말씀이었다.
"내가 이런 남자들을 잘 아는데 결혼하면 확 달라질 사람이야."
아무런 근거도 없는 비난의 시작은 이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서구적인 콧날을 가진 미소년 같은 외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냥 준수한 훈남이었지만, 광진구에 산다는 이 친구는 이유 없이 폭격을 맞기 시작했다.
"남자가 이렇게 하관이 부실하면 돈을 못 모아."
"취업은 언제 한다는 거야? 30살이라고? 아니 빨리 해야 할 것 아냐."
내가 보기엔 본인 인생들도 그렇게 훌륭한 삶은 아니었다. 건너편에서 연신 추임새를 넣는 메뚜기 매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카 운동회에 참석하여 달리기를 하다가 5주 발목 부상을 당했던 인물이다. 메뚜기는 뛰는 것보다 나는 것이 익숙했나 싶었다. 나는 동병상련과 측은지심으로 동생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잘 생겼구먼. 아니 빨리 결혼하라고 하면서 왜 이렇게 보지도 못한 사람을 비난하세요. 자기가 알아서 잘 만날 테니 걱정 마세요."
나의 고독한 외침에 일부 친척들은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고, 메뚜기 매형은 내 팔자주름이 깊어지는 것 같다는 도그사운드를 토해냈다. 난 빨리 이곳을 도피하고 싶었다. 그때 또다시 벨소리와 함께 나의 서현이가 도착했다.
서현이는 도착하자마자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어린 도도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메뚜기 매형은 서현이에게 친한 척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서현아, 내 옆으로 와. 삼촌이 용돈 줄게."
서현이는 한번 메뚜기를 쓱 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싫어요."
아! 내 조기교육이 성공한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만큼은 마카롱으로 일일 당뇨에 걸리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서현이가 이뻐 보였다. 서현이는 나를 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삼촌, 마카롱."
어두운 할렘가에서 마약을 거래하는 듯한 서현이를 보고 나는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서현이랑 산책이나 좀 하고 올게요."
그렇게 나는 폭격당하는 사촌동생을 놔두고 서현이와 별다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가벼운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