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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씽킹 Aug 04. 2024

한국어, 영어, 독일어 쓰는 아이의 우리말 어휘 키우기

3개 국어 동시에 사용하는 환경에서 우리말에 관한 고민을 해결한 해법

자녀의 문해력, 어휘력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님들 많으시죠? 평소에 3개 국어를 동시에 사용해야 하는 환경에 있는 아이로 인해, 같은 문제를 오래 고민하고 나름의 방식을 통해 답을 찾고 있는 필자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요즘 교육 분야의 최대 이슈 중 하나는 문해력과 어휘력인 것 같습니다. 최근 나오는 신간들을 보면 적지 않은 책들이 타이틀에 '문해력'과 '어휘력'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성적 혹은 학습 결과와 직결되는 문제니 만큼 수학, 과학 등 개별 과목으로 세분화한 문해력과 어휘력 관련 도서들도 쏟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문해력과 어휘력이 같은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어휘의 부족이 결국 문해력 부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함께 엮이는 경우가 많지요.


특히 어휘력은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고민이 많은 이슈입니다. 초등학교 과정부터 벌써 8년째 외국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 집 아이가 '우리말' 어휘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말하고 쓰고 읽는 데 무리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 수준이 우리말로 교육받는 제 또래 학생들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괜찮다고 자평하기는 어려운 수준이거든요. 아이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가장 편하게 여기는 영어의 어휘력과 비교했을 때는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이고요. 독서와 검색, 미디어 환경, 심지어 독일어로 교육하는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무리와 수업 시간 외에 영어로 대화하는 상황이니 당연히 영어 어휘가 우리말 어휘보다 앞설 수밖에 없긴 하지만, 모국어가 한글인 한국인으로서 제 수준에 미달인 어휘를 구사하는 것은 항상 깊은 고민거리이자 걱정입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여러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환경에 있다 보니 부모로서 원하는 수준의 우리말 어휘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아이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방관할 수도 없죠. 해서 오늘은 제가 몇 년 간 꾸준히 아이에게 적용하고 있는 일상 속 방법을 공유해 볼까 합니다. 그나마 아이가 어디 가서 '우리말 실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지 않는 데는 다음과 같은 평소의 훈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미지_픽사베이


첫 번째, 한글 책 읽기인데요, 혼자 읽기와 읽어주기를 병행했습니다.

책 읽기는 많은 전문가들이 어휘력과 문해력 향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는 항목이고 어쩌면 가장 양질의 방법일 겁니다. 어릴 때부터 독서량이 적지 않았던 아이는 외국 교육 환경에 놓이게 되면서 한글보다 영어책을 더 많이 보게 됐어요. 그래도 2~3학년 정도까지는 영어 책과 한글 책을 같은 빈도로 보더니 학년이 더 높아지자 한글 책은 먼저 선택하는 일이 드물어졌습니다. 그때부터 필자의 마음도 조급해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아이가 좋아하는 카테고리의 책이나 꼭 읽어보아야 한다고 판단한 책을 추천해서 읽도록 했고, 잠자리에서 읽어주는 책을 고를 때도 가능한 단순한 이야기 책보다는 풍성한 어휘가 포함된 책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적어도 책 읽기를 통한 우리말 어휘력 향상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문해력이 아닌 어휘력으로 한정한 이유는 독서 경험이 많은 만큼 어휘가 부족한 것 대비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은 크게 걱정되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중 쓸 수 있는 독서 시간은 한정적인데 아이는 영어 책을 먼저 읽고 싶어 했고, 학교 과정을 따라가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그게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으니까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건 '읽어주기' 였어요. 중학생이 되면서 읽어주는 독서는 점점 뜸해져서, 이제는 어쩌다 책을 읽다 공유하고 싶은 구절이나 내용이 있을 때 부분적으로 읽어주는 게 전부가 됐지만, 6학년까지는 거의 매일 적어도 30분은 책을 읽어줬어요. 그때 고른 책들은 어린이나 청소년 도서보다는 어른 책이 많았는데요, 혼자 읽는 책이 아닌 만큼 제 수준보다 어려워도 된다는 판단과 함께 더 고급 어휘와 다양한 표현에 노출되도록 하고 싶었던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효과는 있었어요. 문장을 읽다가 모르는 어휘가 나오면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걸 통해 아이는 더 많은 어휘에 노출될 수 있었죠. 물론 전부 자신의 어휘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면 경험하지 못하는 어휘와 문장, 표현을 듣고 한번 마음에 새겨보는 자체로 큰 의미가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두 번째, 부모의 어휘력에 더욱 신경을 썼습니다.

책 읽기를 통한 어휘 향상에 한계를 느끼면서 깨달은 것은 일상 언어에서 어휘를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어요. 아이와 대화하는 시간만큼은 항상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 기회야말로 다양한 어휘를 심어주기에 적절했죠.

그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아이와 일상 대화를 할 때도 '일상적인' 어휘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일부러 한자어를 섞어 쓰거나 어려운 표현을 넣어서 말하고, 같은 표현을 두 번 반복해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유의어를 사용해 다르게 말하는 식으로 가능한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려고 노력하죠. 개인적으로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는데요,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죠. 아이는 대화 중에 처음 들어본 어휘나 표현을 들을 때마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물어봤고, 그렇게 자연스레 어휘 공부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어휘나 표현이 나오면 꼭 한번 사용해 보거나 어떤 경우에는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도 있었어요. '태반'이라는 어휘가 대표적인 예인데요, 어느 날 대화 중 제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어휘 대신 '태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아이는 그 말이 굉장히 흥미로웠던 모양입니다. 그날 이후 아이는 '대부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늘 '태반'이라고 말하죠. 어른들 중에도 잘 모르는 이가 많을 텐데 아이가 그 표현을 쓸 때마다 웃음이 나곤 합니다.

최근 나오는 책들 중에 부모의 어휘력을 다루는 책들을 봤는데요, 부모의 어휘가 아이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 절대 동의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책 속 어휘보다 더 강력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매일 일상 속에서 풍요롭고 다채로운 어휘를 접하고 듣고 경험하는 아이들은 별도로 어휘력 키우기 위한 노력이나 학습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어휘력일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물론, 과목별 공부에 필요한 '어휘'라고 한정하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요.


이미지_픽사베이


세 번째, 밥상머리 대화를 활용했습니다.

'서진이네'라는 예능 프로그램 아시나요? 유명 배우들이 외국에서 한식당을 열고 운영하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으로 시즌2를 방영 중인 지금은 아이슬란드가 그 배경입니다. 별로 자극적이지도 않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그 프로그램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현지인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의 '맛 표현'이나 음식에 대한 감상을 듣는 일입니다.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서진이네 2'를 보고 있었을 때는 심지어 "영혼을 따뜻하게 해주는 음식"이라는 표현까지 나오더라고요.

언젠가부터 방송을 보다 깨닫게 된 사실이 있는데요,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리액션으로 내뱉는 표현들이 '대박', '미쳤다', '찢었다'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라고요. 뭐, 짧고 굵고 강렬한 표현이기는 하나 분명 저 단어 뒤에 하고자 하는 '진짜 말'이 있을 텐데 저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쉽고 안타깝게만 느껴졌어요. 이에 대해서는 최근 인기 방송 프로그램인 '유퀴즈'에 출연한 서울대 나민애 교수님도 같은 지적을 하셨는데요, 나태주 시인의 딸이자 서울대 신입생 필수 과목인 문해력 수업을 진행하는 나 교수님 역시 "우리는 '대박'이라는 단어로 모두 통칭해 버린다. 경치가 멋있어도 '헐 대박'이라고 하고 놀라운 얘기를 봐도 '대박'이라고 한다. 단어의 다양성이 축소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다시 제 상황으로 돌아와, 출연자들의 똑같은 리액션에 대해 아이와 진지하게 대화를 했던 적도 있는데요, 거기서 착안해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혹은 감상을 표현할 때 가능한 내가 느끼는 바를 솔직하고 자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됐습니다. 물론 여전히 아이는 "맛이 어때?"라고 물으면 "최고야", "맛있어", "좋아" 등 단순하고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만, 그럴 때면 제가 먼저 여러 어휘를 포함한 섬세하고 다양한 맛 표현을 던지며 아이의 '다른 표현'을 유도하곤 합니다.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다양한 어휘를 섭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삼 시 세끼 밥 먹을 때마다 그렇게 하는 건 매우 고단한 일이기도 하고, 또 반복적으로 먹는 밥상에 딱히 다른 어휘나 표현을 하는 것도 억지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혹은 새로운 음식을 먹거나, 낯선 장소에 갔거나, 감동적인 장면을 마주했을 때 이 방법을 사용해 보면 어휘력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음식이나 장면에 대한 기억이 더 오래가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신문과 TV 등 미디어를 적극 이용합니다.

오랫동안 아이와 하고 있는 '엄마표 토론'에서 하는 신문 읽기는 사실 가장 오래된 방법이자 효과를 확신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뉴스 안에는 특정 이슈와 관련된, 일상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어휘가 많이 포함돼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매번 다른 이슈를 다루는 만큼 오히려 책에서도 접하지 못하는 풍성한 어휘를 경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적극 추천할 만합니다. 뉴스를 읽은 뒤 각자의 의견과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어휘력과 표현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고요.  

만일 신문 읽기를 버거워하거나 오히려 재미를 느끼지 못해 역효과가 나는 경우라면, 헤드라인과 중간 제목만 읽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저 또한 토론을 위한 신문 읽기 외에도 집에 배달되는 종이 신문을 넘기며 관심 있는 뉴스의 헤드라인을 읽어보게 한다거나, 가족 단톡방에 아이가 관심 있는 분야나 흥미로운 이슈에 관한 뉴스를 공유한 뒤 짧게라도 관련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는데요, 이런 방식은 일상적 대화 만으로 채우기 어려운 어휘 노출에 아주 효과적입니다.


하나 더, 우리 집에서는 가끔 '심사위원 놀이' 풍경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열광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며 식구들 각자 '심사위원' 역할로 분해 각자의 심사평을 쏟아내는 것인데요, 맛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다양한 어휘를 사용해 자신의 감상을 자세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거기다 역할 놀이를 하는 듯한 재미와 서로가 서로의 표현을 들으며 학습하게 되는 효과는 덤이고요.


주변에 보면 어휘력을 키우기 위한 방식으로 '어휘력 문제집'을 활용하는 친구들도 많은데요, 어휘는 습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말과 글을 통해 자주 써봐야 하는데요, 그런 차원에서라면 문제집보다 더 필요한 것은 '일상 속 여러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당장, 밥상머리에서 '맛 표현'부터 한 번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요?  


** 이 글은 토론 교육 웹사이트 <어나더씽킹랩 anotherthinking.com> '공감랩'에 실린 글입니다.


커버 이미지_©어나더씽킹랩 via Dal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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