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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대화장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의 차이가 뭔지 알아?"

손글씨 지적에서 시작해 초코파이 절도 소송까지

by 어나더씽킹

학교 가는 차 안, 아이는 급하게 영어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빌리 엘리엇'을 본 후 소감을 써 가는 숙제였는데, 전날 깜박했다고 하더라고요.

숙제를 잊어버린 것 정도로(^^) 저는 야단치지 않습니다. 숙제를 안(못)해 가서 혼나는 것도 본인이고, 뒤늦게 알아차리고 하는 것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요.

단 하나 신경이 쓰이는 것은, 매번 '핸드라이팅'으로 담임 선생님이기도 한 영어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아온 터라 흔들리는 차 안에서 쓰는 글씨가 괜찮을까, 하는 것이었죠. (*오죽하면 선생님이 "너의 시험 답안지 텍스트를 읽기 전에 심호흡한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라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요.;;;)


흘끔 보니 제법 괜찮게 쓰더라고요. 그런데 'y'를 흘려 쓴 게 꼭 'g'처럼 보여서 그 부분은 말해주고 넘어가야겠더군요.


나 : "2년 전에 영어 가르쳤던 'Ms. S' 알지? 그 선생님이 만약 너의 시험 답안지를 채점했다면 'y'인지 'g'인지 헷갈린다는 것만으로 감점 처리했을 거야. 엄마가 들었는데 고학년 영어 시험에서 조금만 이상하게 써도 다 감점 처리해서 학생들이 엄청 따지고 그랬대. 지금 선생님은 진짜 잘 봐주고 계신 거야. ㅎㅎ 선생님 힘들지 않게 스펠링 잘 써야 돼."


아들 : "문맥이라는 게 있잖아. 이게 혹시 'g'랑 비슷해 보인다 해도 'y'로 썼겠구나 하고 문맥상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으니 괜찮은 거야."


나 : "물론 그렇지만, 엄격하게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라면 감점 처리해도 할 말이 없지. 그런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


아들 : "엄마, 어리석은 사람과 똑똑한 사람의 차이가 뭔지 알아? 바로 '센스'야. 현명한 사람들은 상황과 분위기를 보고 전체를 파악하고 융통성 있게 적용하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런 센스가 없어. 예를 들어서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고 진짜 안전한 상황에서는 무단 횡단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오 이런! 아이가 하필 '무단 횡단'을 예로 드는 바람에 도전 의식이 생기더라고요.


나 : "아, 그건 좀 아니지. 진짜 안전하다는 판단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럴 거면 규칙과 기준이 왜 필요하겠어? 센스가 필요하긴 하지만 규칙과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겠다고 한다면 규칙이 이길 수밖에 없는 거야. 너, 엄마가 보내줬던 초코파이 절도 소송(*한 물류회사와 그 회사의 협력 업체의 직원으로 보안업무를 맡은 A씨 사이의 소송으로, A씨가 물류회사 사무실 냉장고에서 초코파이와 커스터드 하나를 꺼내 먹은 후 절도 혐의로 법정에 선 사건) 기사 봤지? 그 사건만 해도 사실 네가 말한 '센스'를 적용하면 법정까지 갈 일이 아니지. 그런데 그 회사가 합의가 아니라 처벌을 강력히 원해서 소송까지 간 거라고 하잖아."


아들 : "그건 진짜 심했더라. 그 회사는 도대체 어떤 곳이야? 초코파이 먹은 사람은 보안 담당이라 그게 절도죄가 되느냐 아니냐가 직업적으로도 진짜 중요하겠던데. 정말 센스가 없는 회사야."


나 : "그러게 말이야. 이럴 때야 말로 진짜 센스가 발휘되어야 하는 거지. 물론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건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지 이렇게 법정까지 가는 건 서로 좋을 게 있을까? 결국 언론에 나고 엄청 이슈가 되면서 그 회사는 굉장히 곤란해졌을걸? 여하튼,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센스가 중요하다'는 네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규칙과 기준이 무시될 수는 없다는 거야."


이쯤 하다 학교에 도착.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사서삼경의 '중용'에 나오는 '신독'하는 자세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남들이 안 볼 때도 스스로 항상 경계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까지 말했으면 너무 꼰대 같았으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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