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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귀군경(民貴君輕) - "대한국민"입니다.

by 따름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괴로운 진실이 있습니다. 또 때로는 너무 자세히 오래 바라보다 마음이 아픈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인간에게 두 눈이 주어진 것일까요? 선명하게 보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때, 한쪽 눈을 감고 나머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라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선명하게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틀림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의 이면까지 읽어내야 합니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기꾼은 선량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검은 속내는 드러내지 않지요. 우리가 두 눈으로 직접 선량한 그를 분명히 보았는데,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판단할 때는 때로는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속내까지 헤아리기 위해 한쪽 눈을 감아야 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을 100%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완전한 신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 믿지 말고, 다 말하지 말며, 다 보여주지 않아야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은 사기꾼을 경계할 때뿐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관계에도 적용됩니다.


이런 생각은 인생을 너무 각박하게 바라보는 태도일까요?


인간은 원래 자기 위주로 생각하도록 설계된 존재입니다. 악해서가 아니라, 생존 본능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보호 본능이 탁월했던 유인원의 후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는 행동을 나쁘게만 보지 말고, 오히려 나를 보호하는 방법에 집중해야 합니다.


조선의 임금은 면류관 앞뒤에 열두 줄의 구슬을 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지 말고 가려보라'는 뜻이었지요. 귀 옆에 달린 작은 솜뭉치는 말을 걸러 들으라는 의미였습니다. 다 보고, 다 듣다 보면 오히려 중요한 고려를 놓치게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본 것이 다가 아닐 수 있다"는 태도가 결국 나를 보호하는 지혜입니다.


그럼 왜 눈은 두 개인 것일까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알고리즘이라는 단어는 이제 너무 익숙합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검색하는 순간, 우리는 오직 그것과 관련이 있는 영상들만 보게 됩니다. 이는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가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운 마음은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에 대한 경계의 표시이고 경고입니다. 가능한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취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반만 보지 말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 하는 경우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개의 정보와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 정보들 중에는 진실이 아닌 것도 있고,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생산된 자료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지점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저작권’입니다. 저작권은 창작자의 권리를 지켜주는 장치이지만, 때로는 정보 접근에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원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한 창이지만, 오히려 눈을 가리는 장막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두 눈을 뜨고 따져야 합니다. 어떤 정보가 합법적으로 제공된 것인지, 어떤 주장이 허락된 범위를 넘어선 것인지, 단순한 편향인지, 아니면 법의 이름을 빌린 통제인지.


정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눈이야말로, 진실을 가릴 수도 있고 밝힐 수도 있는 가장 결정적인 ‘권리’입니다. 저작권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벽이 아니라, 창작과 존중의 균형을 지키는 다리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수용자’인 우리가 똑바로 볼 줄 아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일부러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진상을 감추고, 속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지요.


‘백성 민(民)’이라는 한자가 있습니다. 이 글자는 한쪽 눈만 창으로 찔린 힘없는 국민을 뜻합니다. 양쪽 눈을 다 멀게 하면 일을 부릴 수 없으니, 한쪽 눈만 보지 못하게 만든 것이지요.


오늘날, 알고리즘이 사람들의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한쪽 눈은 가려지고, 나머지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되며, 보지 못한 세상은 모두 거짓이라 믿게 만들어 버립니다.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의 일부입니다.

언니들은 모이자마자 한자부터 공부했다. 1800자는 알아야해. 신문은 읽을 수 있어야지. 각자 펜글씨 공책에 서른자씩 쓰고 암기하는 일이 끝나면 성희 언니의 어색한 노동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우리는 고귀해. 말문이 막히거나 기억이 얼른 안 날 때마다 성희 언니는 추임새처럼 그 말을 넣었다.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이 법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출처: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155


우리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찾고 지키고자 애써온 수많은 고귀한 삶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 권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국민’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나오는 개념으로 한국인,
대한민국 국민을 뜻하는 말이다.
대한민국국민 정체성을 갖는 사람을 말하며,
국적정체성적인 한국인을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주어이기도 하다.


그러니 대한국민이라면, 두 눈으로 똑바로 바라봐야 할 것과 때로는 한쪽 눈을 감고 바라봐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힘들게 싸워 쟁취한 당연한 귄리들를 온전하고 당당하게 행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스스로 자신의 한쪽눈을 가려 까막눈을 자처하려 하는 것입니까.


옛말에 민귀군경(民貴君輕)이라 했습니다.
백성이 존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는 뜻이지요.


오늘날의 "대한국민"은 더 이상 다스림과 가르침을 받아야만 하는, 한쪽 눈이 가려진 약하고 무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 보고, 듣고, 판단하여 각자의 의사 결정을 내릴 줄 아는 주권자입니다. 권한이 있으나 행사하지 않는 권리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알고리즘과 각종 홍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정보의 유혹 앞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무엇을 한쪽 눈으로 바라볼지를 계속 고민해야 합니다. 사실, 몇십 년을 살아온 저 조차도 늘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물며 젊은 세대는 또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고민해야 합니다. 세상에 단 한 가지의 완벽한 방법은 없습니다.


잘 산다는 것, 올바로 산다는 것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바로잡아 가면 되지 않을까요.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는 그것을 지키고자 애쓴 사람의 고요한 무엇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포기한 인간의 권리는 그 누구도 대신 찾아주지 않습니다. '올바로 잘 살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잘 행사할 줄 아는 대한국민이기를 바랍니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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