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 애벌레
한 마리 애벌레가 천천히 기어가고 있습니다. 접었다 폈다, 접었다 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던 애벌레는 자신만의 고치 속으로 들어가 성장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후 애벌레는 마침내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갑니다.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아주 흔한 애벌레의 이야기입니다. 이 평범한 광경이 영화 <승부>를 보다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바로 조훈현 국수댁 거실에 걸려있던 족자의 글,
굴굴신(屈屈伸)을 보고 말입니다.
굴굴신(屈屈伸)은 조훈현 기사의 스승이자 바둑의 성인인 후지사와 히데유키(슈코센세) 선생의 친필로, 즉 몸을 굽히고 굽히다가 쭉 편다는 의미입니다. 인내하고 인내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자 ‘굴(屈)’은 ‘주검 시(尸)’와 ‘나갈 출(出)’이 결합된 글자입니다.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 위를 무언가가 막고 앉아 있는 형상입니다. 그러니 몸을 굽혀야만 하는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굴굴(屈屈), 한자에서 글자가 두 번 연속 나오는 것은 단 두 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여러 번 굽혀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수차례 몸과 마음을 굽혀야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글자의 순서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굽혀야 하고, 먼저 자신을 낮춰야 하기 때문에 신(伸)에 앞서 굴(屈)이 먼저 등장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굽혀야만, 나중에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고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드디어 몸과 마음과 자신의 생각을 쭉 펴는 펼 신(伸). 펼침의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펼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에서 펼침이 계속되지 않듯 굽힘 또한 영원하지 않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한 가지만 계속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펼침 이후 반드시 다시 굽혀야 하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살다 보면 언젠가 또 다시 펼 수 있는 날 오겠지요. 언제까지고 굽히기만 하는 인생은 없지 않겠습니까. 반면 오늘 쫙 펴진듯한 하루를 보냈다고 해도 너무 나태해 지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시인 나태주 선생은 자신의 딸 나민애 교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고치가 필요하다고. 자신만의 고치는 자신이 성장하고 커 나갈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굽히고 폈다를 반복하다가 그 고치 속에 들어가 자신의 성장을 위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작은 애벌레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내 안에 가지고 있는 나만의 날개를 가꾸기 위해서 말이지요.
혹시 오늘도 굽히기만 해서 속상하신가요. 언제까지 굽히고만 살아야 하는 인생인가 한탄스러우신가요. 저도 늘 그렇습니다. 매일 굽히고 낮추다 보면 사람들이 날 우습게 볼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조훈현 님의 거실에 굴굴신이라는 글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세계 1등 조차도 저와 같은 고민을 하며 사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 조훈현 구단은 펼침뒤에 수많은 굽힘을 경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서양의 격언이나 동양의 성어를 봐도 이와 같은 고난뒤의 극복이나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습니다. 어려움 뒤에 찾아올 희망의 메시지를 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온다니까 믿긴 합니다만 그래도 발 쭉 펴고 살날이 조금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살짝 욕심을 얹어 바라봅니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 당신을 죽이지 못한 고난은 오히려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 고난은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라는 서양식 철학.
臥薪嘗膽 (와신상담)
"땔나무 위에 눕고 쓸개를 핥는다"
→ 수모와 고통을 참고 견디며
복수나 뜻을 이루기 위한 인내를 상징합니다. 굽힘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사.
苦盡甘來 (고진감래)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뜻.
고난을 견디면 결국 좋은 날이 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塞翁之馬 (새옹지마)
"변방 노인의 말"
→ 인생의 좋고 나쁨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뜻.
굽힘도, 펼침도 결국 순환한다는 철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3tKh-Fhkf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