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거대한 그늘’이 사라진 뒤, 누가 그들의 날개가 되어줄 것인가
“내가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죽는 것.”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의 가장 슬프고도 절실한 소원이다. 이 한 문장 속에는 현대 사회의 차가운 현실이 뼈아프게 녹아 있다. 핵가족화와 개인주의가 가속화된 이 시대에, 부모라는 최후의 보루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추락하지 않고 비상할 수 있는가.
지난 12월 성료된 권세진 작가의 개인전 ‘RUNNING CANVAS’는 우리에게 단순한 예술적 감동을 넘어, 장애인 자립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졌다. 필자는 오늘 권세진이라는 ‘가능성’을 통해, 장애인 가족이 마주한 현실과 과학기술이 제시하는 미래, 그리고 우리 사회가 갖춰야 할 ESG적 책무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부모의 그늘: 대체 불가능한 평화이자 위로
권세진 작가는 아스퍼거 증후군(자폐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는 복잡한 자동차 엔진 구조와 드럼의 비트 속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의 어머니 최경임 씨는 인터뷰에서 “세진이가 작업할 때만큼은 철저히 혼자이며, 그 속에서 심리적 평화를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 ‘평화’의 이면에는 부모와 가족의 치열한 헌신이 있다. 아빠의 현장 동행, 엄마의 소통 대변, 여동생의 기술적 협업이라는 단단한 삼각편대가 있었기에 권세진의 엔진은 멈추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지속 가능성’이다. 부모는 영원하지 않다. 그들이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성인 발달장애인은 시설로 가야 할까, 지역사회에 남아야 할까? 시설은 통제와 격리의 문제가, 지역사회는 방임과 고립의 위험이 도사린다.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권세진의 사례를 ‘천재의 성공담’이 아닌 ‘자립의 실험실’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뇌과학과 AI, 그들이 공존할 새로운 무기
다행스러운 것은 과학이 그들의 홀로서기를 돕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감수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기술이 보완하고 있다.
해외 석학들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를 단순한 치료의 대상이 아닌, 뇌 신경망의 독특한 연결 방식인 ‘신경 다양성(Neurodiversity)’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최근 스탠퍼드 대학교 의과대학(Stanford Medicine)의 연구팀은 AI 알고리즘을 활용해 자폐 아동의 뇌 스캔 데이터를 분석하고, 개인별 맞춤형 행동 치료 모델을 제시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이는 획일적인 치료가 아닌,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정밀 의료’의 가능성을 열었다.
약물 치료 분야에서도 진전이 있다. 로슈(Roche)와 같은 글로벌 제약사들은 자폐의 핵심 증상인 사회적 의사소통 결함을 개선하기 위해 ‘바소프레신(Vasopressin)’ 수용체 길항제 등의 임상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물론 ‘마법의 알약’은 아직 없지만, 불안과 강박을 조절하여 그들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약물학적 보조 수단은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인공지능(AI)의 역할이다. MIT 미디어랩의 로잘린드 피카드(Rosalind Picard) 교수가 주도하는 ‘감성 컴퓨팅(Affective Computing)’ 기술은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자폐인의 스트레스 수치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한다. 감정 폭발(Meltdown)이 오기 전 미리 감지하여 보호자에게 알리거나,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기술이다.
권세진 작가가 드럼 비트와 엔진 소리에서 안정을 찾듯, 미래의 AI는 장애인 개개인의 ‘디지털 동반자’가 되어 부모가 없는 빈자리를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채워줄 수 있을지 모른다.
홀로서기는 ‘혼자’ 서는 것이 아니다
권세진 작가의 어머니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으로 세상과 어울릴 수 있겠다는 용기”를 이야기했다. 이것이 핵심이다. 독립은 고립이 아니다. 부모가 없어도 지역사회가, 기술이, 제도가 그들을 지탱하는 ‘안전한 의존’이 가능한 상태가 진정한 독립이다.
장애인 인식개선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자”는 시혜적 태도가 아니다. 그들이 가진 고유한 우주(Universe)를 인정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이다.
권세진이 그리는 엔진은 혼자 돌지 않는다. 수많은 부품이 맞물려야 동력을 얻는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부모라는 거대한 그늘이 사라진 후에도 그들이 추락하지 않으려면, 우리 사회가, 기업이, 그리고 기술이 그들의 새로운 날개가 되어주어야 한다.
ESG 경영의 ‘S(Social)’는 바로 이곳을 향해야 한다. 권세진의 캔버스 위에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다. 이제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남아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최봉혁 칼럼니스트
ESG 경영 / 장애인 인식개선 전문가
<더이에스지(The ESG) 뉴스> 편집인
장애인인식개선신문 발행인
한국구매조달학회 이사
지속가능과학회 부회장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전문강사
[Fact Check & References]
신경 다양성(Neurodiversity) 연구:
내용: 자폐를 질병이 아닌 신경학적 차이로 규정하고 강점을 활용하려는 접근.
출처: Stanford Neurodiversity Project, Lawrence Funke et al. (Stanford University). 이 프로젝트는 신경 다양성을 가진 인재들이 직장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모델을 연구 중임.
AI 및 정밀 의료 연구 (Precision Psychiatry):
내용: AI 및 기계 학습을 통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바이오마커 식별 및 개인 맞춤형 치료 접근.
출처: Nature Medicine, "Identification of autism subtypes with distinct brain transcriptomic profiles" (2023 관련 연구 참조). AI가 뇌 영상 및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해 하위 유형을 분류하는 연구가 활발함.
감성 컴퓨팅(Affective Computing):
내용: 웨어러블 센서를 통해 자폐인의 생체 신호(피부 전도도 등)를 분석하고 감정 상태를 파악.
출처: MIT Media Lab Affective Computing Group. 로잘린드 피카드 교수는 스마트 워치 형태의 센서(E4 sensor 등)를 통해 발작이나 멜트다운을 예측하는 연구를 선도함.
약물 개발 현황 (Balovaptan 등):
내용: 사회적 상호작용 개선을 위한 바소프레신 1a 수용체 길항제(Balovaptan) 등의 임상 시험.
출처: Roche Clinical Trials. (참고: 일부 임상은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해 중단되기도 했으나, 여전히 관련 기전(GABA, Oxytocin 등)을 타깃으로 한 연구는 지속되고 있음).
권세진 작가 사례:
출처: 2024년 12월 2일 성료된 제3회 개인전 'RUNNING CANVAS' 현장 취재 및 최경임(모친) 인터뷰 내용 기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