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uese Oct 04. 2024

달과 당신과 나의 기도

떨림의 농도


추석, 밝은 달이 둥둥 떠있다. 언젠가 둘이 앉아 이틀 만에 다 보고 말았던 드라마에서, 하늘을 날던 주인공이 펑 하고 부딪혔던 ‘분양’ 이라 쓰인 광고 풍선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깨닫는다. 여지없이 그 사람을 떠올린 나를.


바람결에 머리칼에 배어있던 기름 냄새가 떨어져 나와 코 끝에 붙는다. 괜한 유난을 떨며 이번 명절은 시댁, 친정 식구들 모두 모여 같이 보내자는 언니집에서, 처음 겪는 명절 중노동을 종일 한 덕이다. 어른들이 서로 친한 사이이기도 하고, 나와 동갑내기 친구이기도 했던 사돈처녀는 결혼 후 미국에서 생활 중이고, 나는 혼자니까. 두 집이 다 모인다 해도 단출하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모이는 편이 조금 더 명절 같다고는 생각한다.

8명이 두 상 가득 음식을 펼쳐놓고 웃고 떠들다, 윷놀이도 하다, 마술사들이 연 카페에 온 손님들의 사연을 이야기해 주는 프로를 보다 했다. 복작거리는 와중에, 본가에 가서 저녁 먹고 돌아와, 내가 없는 방에 혼자 있을 그 사람이 괜스레 서글프다.


아주 좋아하는 BBC의 셜록에 크리스마스가 되면, 늘 함께라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이나 그저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축복하고,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해주고 하는 장면이 두어 번 정도 나온다. 나이나 결혼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것들로 인한 질문 공세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함께이고 싶은 날들에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래서 이 밤, 둘이 손 꼭 붙잡고 산책을 하다, 나란히 서서 멀뚱 거리며 저 동그란 달을 바라보고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 사람의 가느다란 머리칼에서도 종일 찌든 기름 냄새가 솔솔 나겠지.


- 뭐 하고 있었어? 잤어요?

귀뚜라미 소리가 썩 커진 밤길을 걸으며 불쑥, 눈물이 날 만큼 그리워진 그 사람에게 화상 전화를 걸었다.

- 으응.. 이제 나왔어?

졸음이 쏟아지거나 잠이 덜 깼을 때의 그 사람 목소리다.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 서로가 어둑어둑한 공간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어떻게든 카메라 앞에 얼굴을 맞추어, 서로가 부재했던 하루의 일과를 짤막하게 공유하고, 소곤거리며 웃다가,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고백으로 통화를 마쳤다.


사랑의 목표가 다르다. 무작위 한 형태의 결혼이라는 틀에 관계를 욱여넣고, 각자의 취향대로 여기가 들어맞지 않는다, 저쪽엔 빈틈이 생겼다, 재단질 하고도, 당하고도 싶지 않다. 어떤 미래도 보장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도 나는, 내가 그 사람을 내일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보다 훨씬 더 오랜 후에도 계속해서 동일한 양만큼 사랑하고, 더 소중히 하리라 믿는다. 그가 쭉 그런 내 곁에 함께 있어 주리라 믿는다. 이 터무니없을 만큼 완벽한 믿음의 원천은 언약이나 증명서 같은 것이 아니다. 촉이 좋고 의심 많은 내게, 이토록 명확한 믿음을 주는 그 사람 자체이다. 그러니 나의 사랑은 그 믿음이 끝나는 날까지이겠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이고 싶은 진심이, 함께이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로 변질되는 과정을 겪고 싶지 않다. 나는 겁쟁이라 그런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 일은 두렵다.


언젠가, 명절이든 크리스마스든 우리가 두 손 꼭 잡고 함께 교회에 앉아 있거나, 달이 휘영청 밝은 하늘을 보거나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런 때가 오려면 우리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어른이어야 하겠다. 어쩌면 우리 곁에 서로가 아닌 다른 이들이 함께 할 수 없을 만큼 세월이 흘러야 할는지도 모른다.

나는 노을을 좋아하니까, 서쪽 어딘가의 시골이려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농장을 하시던 아버지 덕에 거위들과 염소들과 뛰어놀았다는 그는 가끔, 인터넷만 되면 시골에서 풀 뜯어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니까. 그래도 버스를 타고 7 정거장 정도만 가면 읍내가 나오고, 병원도, 마트도 있는 정도의 시골이면 좋겠다고 내가 덧붙였었다. 그러니, 우리는 아마 그런 곳에서 함께 지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당신 하나만 남는다 하더래도, 나는 그런 날이 오기를. 그런 위험한 소망을 달에게 중얼거려 본다. 그러면 또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또 그리워한다.

- 크리스천이 그런 걸 달한테 빌면 어떻게 해. 하하.


길고 긴 시간과 장면과 사건들을 함께 나눠가진 우리가, 서로를 곁에 두고 나이를 먹어 서로가 아니면 의지할 곳이 없을 언젠가에,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채로 이 동그란 달을 함께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번엔 내가 믿는 신께 진심을 다해 기도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를 기념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