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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쥰세이 Oct 27. 2024

다른 무언가에 젖어버린 것만 같았다




  비의 계절이었다. 이천이십 년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꽤 오래 걸쳐있는 장마전선 속 빗물은 아파트에 갈라진 콘크리트 틈으로 스며들어 베란다 위에 맺혔다. 매달려있다가 떨어진 물방울은 널려있던 빨래를 젖게 했다. 머리에 떨어진 물방울이 이마를 지나 얼굴에 흘렀을 때 나는 청장을 올려다봤다.


  

  그날 일을 마치고 내 방에 들어왔다.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로 투신했다. 발라놓은 순간접착제가 말라가듯 몸은 침대에 딱- 달라붙어 갔다. 의식은 침대 같은 생각을 찾아 뒤적인다. 몸이 누울 곳을 찾는 것처럼 나의 의식은 닿으면 안락해지는 생각과 기억을 쫓아 뇌리를 헤맨다. 여러모로 까다로웠던 하루의 끝에서 의식의 걸음이 더욱 빨라진다. 방황하는 걸음이 느려지다 멈추어갈 때 나는 꿈을 꾸었다. 눈을 뜬 의식은 잠이 들기 직전에 그날 근무 중 기억장치를 눈 감은 의식에게 전달한다. 특이 사항 등을 꼼꼼하게 인계한다. 거기까지가 눈을 뜬 의식의 일과 마감이다. 그 작업은 영화관 시스템 같기도 하다. 문이 닫히고 외부에서 드는 빛을 차단한 후에 상영을 시작하는 극장처럼 눈을 감아 내 안에 빛이 점점 줄어가다 사라지면 누군가 선명해진다. 눈을 뜨면 그 사람은 내 안에만 있지만 눈을 감으면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있다.  



  꿈속에서 그 사람을 바라만 본 새벽, 우리가 만났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카노죠[1]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만 카노죠를 바라보다가 곁에 누가 앉아 있는지 확인했을 뿐이다. 내 시선을 느끼기 전에 고갤 돌렸다. 그런데도 두 눈은 돌아가는 고개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끝까지 카노죠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써가는 데 집중해 있던 카노죠는 끝내 나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카노죠의 의식은 잠시라도 다른 곳을 쳐다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꼭 한번 나를 돌아봐 주기를 바랐다. 내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등을 돌리고 있지만 온 신경은 카노죠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알았다면 분명 고갤 숙여 인사하며 코에 주름이 지게 웃어 주었을 것이다. 나를 마주하면 매번 그랬던 것처럼. 꿈으로 드러난 의식 공간에서 그녀를 카노죠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그녀를 본 상황이 소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속 말라버린 우물 안에 있던 오카다가 저쪽 세계에 있는 호텔 208호에서 구미코를 만난 장면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꿈에서 깨고 눈을 떴다. 가슴이 불편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물리적인 통증은 없었지만, 가슴이 먹먹했다. 가슴속에 쇳덩어리 무게추가 놓여있는 것 같았다. 추의 묵직한 무게를 느꼈다. 그대로 자리에 누워 새벽꿈을 되새겼다. 잔상들은 자성을 가진 것만 같다. 추에 달라붙어 더 무겁게 한다. 쉬이 몸을 일으킬 수 없다. 무게에 따라 분류되어 옮겨지는 트레일러 위 제품들처럼 내 안에 그리움이 쌓여가다 수용 가능한 한계치를 넘어버리면 꿈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모든 기운을 소진해 버려 머리까지 지끈거릴 만큼 힘에 부치면 아른거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가 눈 뜨고 있는 의식 공간을 넘어 눈이 감겨야 열리는 의식 공간에도 나타나 주었다. 어려움을 감당해 갈 때마다 내 안에서 시의적절하게 작동하는 방어기제 시스템을 확인하곤 한다.  



  지난밤 일들을 남겨두려 그녀에 관한 단상을 적어놓은 메모장을 열었다. “그래도 꿈에서라도 보니까 좋다.” 메모의 마지막에 적혀있었다. 언젠가 그녀 꿈을 꾸었던 것이다. 언젠가 나의 마음은 그랬겠지만 이젠 그만 보고 싶다. 그만 꿈꾸고 싶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묵직한 그리움에 나의 아침은 너무나 무방비 상태이다. 식욕도 의욕도 없이 할 일들이 쌓인 아침, 입으로 식빵을 꾸겨 넣는다. 가슴을 꽉 막아버린 무게추가 식빵을 넘어가게 하지 않는다. 손은 식빵을 구겨 또 입에 넣는다. 입은 삼키지 못하고 계속 씹어만 댔다. 오랜만에 메신저 속 그녀 사진을 본다. ‘그래, 당신 꿈을 꾸었어…’ 밤새 내린 장맛비가 세상을 적시는 동안 나는 다른 무언가에 젖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또 온종일 당신이 선했다.


      


[1]그녀의 일본어 표현 かのじょ [카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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