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의 방관자였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는,
반듯하고 평평한 브라운관 안에서 종종
인생의 굴곡진 면면을 본다.
그 프레임 안에 갇힌 삶은,
호쾌하고 익살맞은 희극 같기도
졸렬하고 짓궂은 비극 같기도 하다.
오늘의 아마존과 내일의 아마존이
틀린 그림 찾기 마냥 똑 닮은,
그런 다큐멘터리에 버금가는 지루한 장면들에
하품을 자아내다가도.
부지불식간에 금이 가버려
파편이 튀기는 극단적인 장면 전환을 맞기도 한다.
어느 날엔가 아빠와 오빠가 대판 싸우는데,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나에게서
산통을 깨는 웃음이 쏟아진다.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실소가 아니라,
완벽한 파안대소 말이다.
지금 돌아가는 이 장면이
연출도 볼품없고 개연성도 엉성한,
팔리지 않는 어느 블랙코미디의 한 테이크 같아서.
몇 번째쯤 반복 재생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지나치게 고루하고,
몰입도가 떨어져 버린 한 편의 촌극 같아서.
나는 되려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렸던 것이다.
그 끝도 없이 늘어진 테이프를 감고 또 감다가,
작위적인 일련의 행동과 대사에
그저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다.
그들의 고통에 찬 고성이
화면을 뚫고 나와 온 집 안을 부수고
과열된 몸짓이 내 마음까지 짓밟는데도,
나는 그저 오래된 가죽 소파의 한구석에 처박혀
투명한 막이 쳐진 티브이를 남의 일인 양 본다.
건조해진 눈을 벅벅 문지른 채로,
오롯이 방관자가 되어.
‘도대체 이 우스꽝스러운 드라마는
언제까지 시청해야 하느냐고’
이 따위 불평이나 하면서.
그 살풍경한 아침드라마 속에서 살다가도,
어느 날이 되면 별안간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한창인 채널로
리모컨이 돌아가기도 한다.
갑자기 학과 선배가 시그널을 던지고,
동시에 고깃집 아르바이트생에게 고백을 받다가,
연이어 편의점 삼각김밥을 채우던 중
번호를 묻는 엑스트라가 등장하기도 하면서.
로맨스물의 전형적인 클리셰가
20대 대학생 주인공에게
당연한 수순으로 펼쳐진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모든 핑크빛의 반사판을 쳐내고,
스스로 암막 커튼을 친 채 아르바이트와
과제에 파묻히기를 선택한다.
‘답도 없는 21세기의 캔디구나.’
나는 무감하게 그런 생각이나 한다.
풋내나 폴폴 풍기던 채널에서
잠시잠깐 화면 조정 장면이 스쳐간다.
‘자니?’
헤어지고 몇 년 만에 연락이 온
전 남자친구의 진부한 대사로 시작한
장르 불명의 영상은,
’ 네가 그리워 ‘라는 말을 빙자한
잠자리 파트너 요청과 동시에,
그에게 있는 현재 여자친구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싸구려 치정극으로 전락한다.
혹평을 얹는 것조차 불쾌해진 나는,
그저 썩은 비소를 머금은 채
채널 차단 버튼을 연사 한다.
그렇게 재활용도 불가한 폐기물은
구린내만을 남긴 채 영원히 소각되었다.
이따금 고약한 가위눌림의 심연 가운데에서
흉몽의 바닷속을 헤매는 날엔,
웬 질 낮은 호러 영화 속
티저컷을 연출하기도 하고,
별안간 잘 지내던 친구와 절교를 해버린다거나
30번째쯤 서류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거나 하는,
청춘 성장드라마 속 서사의 공식을 따라가기도 한다.
게다가 그런 주인공과는 별개로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는 가족들의 싸움신도
수없이 많은 테이크를 감고 나니,
파국으로 치달았던 전개에서
마침내 따뜻한 휴먼 가족극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시청자였던 나는 치유와 회복이라는
다소 뻔한 결말을 향한 흐름에도
그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역시 삶이란 게,
언제까지고 비극일 수만은 없는 거라고
품평하면서.
카메라가 360도의 쳇바퀴처럼 돌던
여상한 시퀀스 안에서도,
예고도 없이 일련의 사건이 끼어들기도 한다.
늘 인생에서 한 발 떨어진 채,
지극히 관찰자의 시점으로 관망하던 나에게,
줄곧 하릴없이 드라마만 보던 나에게,
집필의 기회라는 것이 주어졌으니.
기십 년 회차 만에 이만큼이나 반전인 전개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 맡은 이 극본에
첫 스트리밍을 앞두게 되었다.
나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방영일을 기다리면서.
온갖 장르를 넘나드는 이 초장편극은
때론 난감할 정도로 호흡이 늘어지고,
때론 흉포하리만큼 극단적으로 치닫지만.
짧은 인생사 가운데에서도 체득한 점은
어떤 절체절명의 순간이든,
얼마나 지난한 암흑의 구간이든,
그 챕터에는 반드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잠시잠깐의 일시정지도,
뒤로 가기도 허용되지 않는
불친절한 인생일지라도.
지금의 이 시점에 우리가
좀비에게 쫓기는 재난 현장에 서 있다거나,
종말 이후의 디스토피아의 지구에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지 않다는 게
사실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위안을 삼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기에 삶은,
비극보다는 희극에 가깝지 않을까.
어릴 때는 신데렐라의 요정 할머니가
구원투수처럼 등판하여
나를 이 숨 막히는 경기장 한복판에서 꺼내주길
하염없이 기도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신화적이고도
동화 같은 장르는,
드라마틱한 인생에 쉬이 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닫게 되었다.
그런고로,
호박마차나 타고 앉아있는
수동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제 발로 지면을 박차고 달리는
살아있는 인물이 되기로 선택한다.
내 삶을 퀴퀴한 음지에 처박아둘지,
청정한 양지로 이끌지는
행동하는 주연배우이자
대사를 부여하는 집필자인 나에게 주어진 몫이다.
인생의 펜대는
결국 내가 쥐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이 불거질지 모르는
기대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안고서,
필연적인 운명 같기도, 우연의 장난 같기도 한
그 모순된 숙명 속에서 살아간다.
관찰자의 시점으로 앉아있던 나는,
이제 집필자로 우뚝 선 채
우리들의 이야기를 쓴다.
그러니
무덤에 함께 쥐고 갈 이 드라마의 극본만큼은,
절대 열린 결말 따위나 새드 엔딩으로
마무리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네의 인생은 결국 반드시 희극일 거라는
그저 막연하고도 낙관적인 믿음일지라도.
인생의 펜대는,
오직 우리 손에만 쥐어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