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온난화 속 멸종 위기의 피카

우리는 뜨거움을 견디는 종족으로 진화 중입니다

by 청은

9년 차 포유류 인생에 이런 세상은 처음 봐요.


고산 지대의 피카로 태어난 저는

곰이나 다람쥐와는 달리

겨울잠이 허락되지 않은 동물이에요.

그래서 1년 내내 이 구석 저 구석에 있는

건초를 모아 바위틈에 고이 쟁여둬야 하죠.


저는 평야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고립 산중의 디자이너로서,

온갖 기술과 본능적인 감각으로 땔감을 만들어요.


가파른 산지에서 영하의 겨울까지 나려면,

그저 땅굴을 파거나 동굴 속에 숨는 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답니다.


저는 막 성체가 되었을 때부터,

이 생태계를 살아가는 법을 익혔어요.

솜뭉치 같은 무딘 손으로 돌멩이에 그림을 그리고

색칠도 하고, 조립하기도 하면서

흩어진 알갱이들을 석상으로 만들어요.

급기야 그 무거운 반석을 공중에 띄우기도,

요리조리 날아다니게도 만든답니다.


언젠가, 혹시 나는 토낏과가 아니라

꼬리 달린 마법사였나.

태백산맥 출신이 아니라 호그와트 출신인가,

심히 태생이 의심되기도 했어요.


어지간한 짱돌도 제 손에서는 조각품이 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숲이 좀 이상해졌어요.

AI라는 외래종이 바다 건너에서 날아와,

원래부터 제 땅인 양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냈어요.


처음 보는 품종이 영 낯설어 손도 대지 않았는데도,

저 혼자 양분을 머금고 발아하더니

어느새 멋대로 꽃을 피우고

붉은 밭을 이루었어요.


피카로 태어나 본 식물 중

실로 감탄스러운 성장세였답니다.


그 꽃밭은 산불 번지듯 이 산 저 산에 옮겨 붙어

온 세상을 경이롭게 물들였어요.

청청했던 초목들이 온통 붉게 뒤덮여,

불티가 날리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지요.


아니, 이렇게 순 자기 마음대로

남의 산림을 점령해도 되는 거예요?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인공지능 열풍에

잔뜩 가열된 숲 속은 열대우림을 방불케 했어요.

그 열기는 도통 식을 줄을 몰랐답니다.


몇 날 며칠 고온의 날씨가 지속되더니

급기야 강렬한 온난화가 들이닥쳤어요.

아주 생태계 교란종이 따로 없지 뭐예요.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신 산신령님이 나타나

당장 저 종자를 줍지 않고 뭐 하냐고

호통을 치셨어요.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우리는

허둥지둥 산맥을 나다니며

그 생경한 꽃더미의 뿌리부터 수술까지

모조리 주워 다니기 시작했지요.


형형한 더위에 숨이 막혀 한참을 헐떡이다,

제 집 같던 숲길에서 고속도로 위의 고라니처럼

헤매기도 했답니다.

영역을 침범한 이방의 군락이

9년 지기 터줏대감의 길눈 마저

흐리게 만들었어요.


AI가 잠식한 작금의 지구는 마치 용광로 같아요.

그 외계식물이 뱉어내는 신묘한 툴과

새로운 프롬프트가

뜨거워진 세상을 더 빠른 속도로 달궜어요.


붉게 물든 세상은,

마치 산등성이를 내려가는 낙조처럼

저물어가는 한 시대를 예고하는 것만 같았지요.


불길을 따라 부지런히 발을 굴리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지도 모르기에,

더위에 취약한 피카는

그 숨 막히는 온도에 적응하려 애썼답니다.


이만큼이나 흙더미에서 뒹굴었으면,

산중생활이 좀 수월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해가 갈수록 첩첩산중이라니.


저 나름대로 고갯길을 따라

성실하게 올라왔다 생각했는데,

점점 난이도가 백두산 못지않게

가팔라지고 있는 것 같아

당황스러울 따름이에요.


세상은 이제 평범한 마법사 따위는

제 식구로 받아들여주지 않기 때문에,

전지전능한 초월자 정도는 되어야

밥그릇을 지킬 수가 있어요.


그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 동물들은

점차 길을 잃고,

평생을 살아온 산에서 내려가기도 했지요.

변화하는 산세를 읽지 못하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게 되니까요.


그렇게 오랜 터를 떠나거나,

쫓겨난 이들이 많아진 탓에

거리는 어느 때 보다도 포화상태가 되었어요.

그러다 우리는 헐값에 이 산 저 산으로

포획당하고 마구 부려지는 상황에 놓였어요.


무수히 많은 동물들은 태어난 이래로

가장 극심한 멸종 위기에 처해있답니다.


격변하는 생존과 사투의 도가니이지만

어쩌겠어요.

불씨를 움켜쥐지 않으면,

환란 중에 휩쓸려 날아가버리고 말 거예요.


저는 열에 약한 피카이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대한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우리는

뜨거움을 참아내는 종족으로

진화하는 중이랍니다.


불꽃은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지만,

차츰 소강되어 잔열을 품은 채 머물렀어요.

곳곳엔 매혹적인 장미와

이국적인 튤립의 향취가 후끈하게 남았지요.

죄 붉게 물들어 별천지가 된 꽃밭을 지나다

잠시 향기를 맡는 것조차

이제는 꽤 자연스러워졌답니다.


그러나 끓어오른 변화에

지구의 온도는 상승하였고,

우리의 겨울은 더 혹독해지고 말았어요.

내일을 위해 먹이를 더 단단히 준비해야 하는 건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네요.


앞으로 올라가야 할 남은 비탈길들이

꽤나 험준해 보이지만,

길목마다 뿌려진 식량을 야무지게 챙기며

터벅터벅 나아가야겠지요.


이 오르막이 영 버거워도,

낙오자가 되기엔

저는 아직 꿈과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성장기의 토끼이니까요.


그래도 이 백두대간을 따라 쭉 등반하다 보면,

언젠가 정상에 도달할 수도 있겠죠?


과연 그 끝에서 마주할 경관은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행여나 경로를 이탈하게 되더라도,

예기치 못한 갈림길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우리네의 인생이잖아요.


그래도 기왕이면 지나는 풍경을 기억할 수 있게

조금만 천천히 나아가면 좋겠어요.


100미터 전력 질주가 아닌 걷다가 뛰다가

쉬어가는 산행처럼,

주거니 받거니 대화도 하고,

주머니에 넣어둔 간식도 나누고,

뒤쳐진 이들의 등을 밀어주기도 하면서.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한결같이 노래하는 시냇물처럼,

그렇게 단단히 흘러갈 수는 없을까요.


모두가 진종일 달리기만 하다 보면

평화로운 지구의 지면은 금세 달아오를 테고,

그러다 언젠가 태양보다

더 뜨거운 행성이 되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불바다에 삼켜진 땅에서는

지지재재 정겨운 새들의 흥얼거림과

느티나무의 인자한 웃음소리 같은 건

영원히 사라지고 말 거예요.

그렇게 남겨진 무의 속엔

냉각팬의 회전음과 단조로운 신호음만이

딸각거릴 뿐이겠지요.


늘 그렇듯, 만물은 언제나

막다른 길에서도 숲을 갈라 길을 만들겠지만.


저 같은 초식동물들은

식물이 시들고 쇳가루만 날리는 세상 속에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숲이 사라진 곳엔

그 어떤 생명도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화마 같은 불꽃이 아닌

봄볕 같은 들꽃이 되어


부디 이 숲을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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