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부서진 채로, 로마

복원이라는 그 이름.

by 달보노

시차를 적응하지 못한 것인지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운 희수는 밤사이 한국으로부터 온 연락을 확인한다. 시차로 한국은 지금 오후 2시, 다들 점심 먹고 프로젝트 회의를 시작하겠군이라고 생각하자 목구멍 속에서 쓴맛이 올라온다.

로마의 오래된 숙소라서 그런지 밤 새 라디에이터가 돌아가는 소리, 호텔 밖의 홈리스들이 서로 싸우는 소리, 관광객들의 캐리어를 끄는 소리가 희수의 잠을 방해했다.


휴대폰을 확인하지 오늘 바티칸 투어의 가이드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와있었다. 바티칸 박물관에 입장하기 위한 티켓을 PDF파일로 보내준 이준오라는 가이드는 바이칸 박물관 티멧은 PDF 원본을 입구에서 찍어야 입장할 수 있기에, 캡처본은 사용이 불가하다는 말과 함께 늦지 않게 오타비아노(Ottaviano)역 입구에서 만나자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수는 이내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천천히 창문으로 향한다. 로마의 1월 아침은 숙소 창틈으로 스며드는 냉기만큼이나 서늘했다.


호텔 문을 나서는데 프론트에 있던 이탈리아 남자 직원이 희수를 보며 밝게 인사한다. “본조르노(Buongiorno)!”

어젯밤의 눅눅한 기운을 털어내지 못한 희수에게 그의 경쾌한 인사는 오히려 낯선 이물감으로 다가왔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굿모닝이란 인사를 건낸 희수는 테르미니역으로 향했다.


월요일 출근길, 로마의 심장은 이미 거칠게 뛰고 있었다. 지하철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이번에도 티켓을 살까 고민하던 희수는 자신이 미리 준비해 온 트래블 카드가 단번에 태그되는 소리에 아주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오타비아노 역에 도착했을 때, 당혹감이 몰려왔다. 투어 잔금을 현금으로 준비해야한다고 했는데, 분명 역 근처에 현금인출기가 있다고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뭐..어떻게든 되겠지..한국인 가이드니까 상황을 설명해주면 잘 이해해 줄거야.란 생각으로 투어의 집결지로 향한 희수는 분홍색 깃발을 들고 있는 준오와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난다.


“강희수님? 맞으시죠?”

준오의 물음에 희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남색 코트의 깃을 정갈하게 세우고 이탈리아의 관광지를 표현하는 수십 개의 배지를 단 백팩을 멘 그는, 예상보다 키가 컸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서서 희수를 내려다보며 짓는 미소는 서늘한 로마의 1월 공기를 따뜻하게 데울 만큼 다정했다. 잘 빗어 넘긴 머리 아래로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탈리아행을 급하게 결정하면서도 가장 먼저 예약했던 건 바로 바티칸 투어였다.

수많은 투어 업체 중에서도 미술 전공 도슨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고집했던 이유는 명확했다. 희수는 지독하게도 이야기에 목이 마른 아이였다. 부모님의 부재와 친구가 없던 외로운 유년 시절, 학교 도서관은 유일하게 희수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지독한 N(직관형)성향의 공상가였던 그녀는 책 속 수많은 명화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했다.


예술가들이 붓을 들 때의 고독감.

물감 냄새가 진동하는 작업실의 공기, 그리고 그들이 사랑했던 연인의 눈빛까지도.

희수는 때로는 화가가 되어 캔버스를 마주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림 속 주인공이 되어 뜨거운 불같은 연애를 꿈꾸기도 했다.

그 상상과 공상이 힘이 되어 언제나 애정을 갈구했던 희수를 키워냈고, 사람에게 받은 상처들을 치유하고 바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번 투어만큼은 남들처럼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어린 시절 도서관에서 글로만 만났던 거장들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고 상처받았던 그 시절 어린 희수를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에 투어를 예약했다.


특히 희수가 간절히 보고 싶었던 것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La Trasfigurazione)이었다. 도서관의 낡은 화집에서 이 그림을 처음 만났던 어린 희수는 이유 모를 눈물을 흘렸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 기묘한 조화가 꼭 자신의 삶과 같았다는 생각을 했다. “라파엘로는 모든 슬픔을 가장 아름다운 질서로 치유하는 화가야.”라고 믿었던 어린 날의 단정.

그리고 사람에게 배신당한 지금, 희수는 그가 남긴 그림 앞에서 묻고 싶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방법을.


“잔금 때문에 당황하셨죠? 근처에 ATM이 없어서 다들 고생하시더라고요. 제가 회사 대표님 계좌를 알려드릴테니, 이 금액을 계좌로 이체하실래요?”

준오가 희수의 머뭇거림을 눈치채고 먼저 말을 건넸다.

준오가 알려준 계좌에 계좌이체를 한 희수는 사람이 있는 곳을 피해 조금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다.

“어머, 아가씨 혼자 왔어? 용기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혼자서도 여행 잘 다니나봐.”

“그러게, 대학교 졸업하거나 회사 그만두고도 혼자 여행을 오더라고.”

갑작스러운 아주머니들의 질문 세례에 코트의 보풀을 바라보던 희수가 곤란한 미소를 짓자, 준오가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끊어주었다.


“자, 여러분. 여기 분홍색 깃발 앞으로 모여주세요! 다 모이시면 곧 출발할겁니다.”

준오의 목소리가 들리자 웅성거리던 아주머니들이 희수 주변을 떠나 준오를 향해 우르르 몰려간다. 아주머니들의 노골적인 시선에서 벗어난 희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코트 깃을 여몄다. 준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능숙하게 수신기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이 수신기는 바티칸 박물관 내부에서 제가 드리는 설명을 듣기 위한 기계입니다. 바티칸 박물관 입장할 때, 박물관에서 주는 수신기가 있는데 일단 박물관에서는 그 수신기를 이용하고요, 외부로 나올 때는 제가 지금 나눠드린 수신기를 바꿔 착용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박물관 안은 매년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에요. 제 분홍색 깃발을 놓치면 일방통행길을 따라 바로 박물관 밖으로 나가셔야하니, 눈 크게 뜨고 따라오셔야 합니다.”


준오의 농담 섞인 주의 사항안내에 아주머니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따. 그중 한 분이 준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가이드님, 인물이 너무 훤칠해서 깃발보다 얼굴 보느라 길 잃어버리겠어! 한국에는 언제 돌아갈거야? 여자친구는 있고?”

“어머, 그러게. 가이드님 한국 가면 우리 딸 좀 소개해주고 싶네.”

쏟아지는 아주머니들의 질문에도 준오는 당황한 기색 없이 질문을 넘겨냈다. 하지만 그 웃음 끝에는 묘하게 정돈된 슬픔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 과찬이십니다. 저는 로마 국립 미술원에서 회화 복원을 전공하고 있는 가난한 유학생입니다. 아직 한국에 들어가려면 제 공부를 마쳐야하는데 아직 공부의 끝이 보이지 않네요.”


준오의 대답에 아주머니들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희수는 그가 뱉은 복원이라는 단어에 그를 다시 바라봤다. 낡고 바스러진 것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 희수는 가방 속 Rosso의 주인공인 아오이가 사랑했던 준세이를 떠올렸다.


‘복원사라니....’


수없이 읽어 헤진 소설 속 주인공의 직업이 눈 앞의 남자에게 겹쳐졌다. 다른 사람의 기획안을 훔쳐 화려하게 포장하고 타인의 인생을 지옥으로 밀어넣었던 민석. 그런 민석이 화려한 빛을 쫓는 약탈자였다면, 낡은 것을 다듬어 죽어가는 숨을 불어넣는다는 이 남자는 잊혀져가는 것들을 지키는 파수꾼과 같았다. 부스고 빼앗는 것이 승리라고 믿는 세상에서, 묵묵히 시간을 되돌려 제자리를 찾아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 그 극명한 대조가 희수의 가슴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자, 이제 이동하겠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해요!”

준오의 외침과 함께 일행은 바티칸 박물관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