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따개 없는 맥주와 낡은 베이지색 코트
자신의 수하물을 찾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수는 그냥 웃음이 나왔다.
로마의 관광지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컨베이어 벨트들을 바라보며, 정말 내가 로마에 왔구나라는 생각과 허탈함이 몰려들었다.
한국에서 11시간 아부다비를 경유하고, 6시간 반 로마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정말 죽은듯이 잠을 자며 현실을 도피하고자 했던 희수는 이제서야 자신이 이탈리아에 왔구나란 생각에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도 민석과 함께 오고 싶던 곳이었는데, 현실은 비오는 1월의 로마의 날씨처럼 스산하고 아리었다.
로마 공항에서 테르미니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표를 사는 머신 근처로 향한 희수는 머신 옆에서 가족들과 연인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기차로 타기 전 티켓을 초록색 펀칭 기계에 넣은 후,
테르미니 역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었지만
심난한 자신의 마음을 아는 듯 기차안 유모차 속 아이는 40분 가까이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아이의 표현 방법은 울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이 역시 받아들이 못하는 건 자신의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한국에서 무작정 떠나올 때에도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이야기한 사람들 덕분에 백팩에 자물쇠를 달고 가장 허름한 옷과 가방을 들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보풀이 일어난 낡은 베이지색 코트.
온라인 쇼핑몰에서 급하게 구매한 가죽냄새가 나는 크로스백.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은 어떨까. 정말 지금 내 현실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희수의 머릿속에 가득하다.
테르미니 역은 경찰과 군인들로 가득하다.
민석과 함께 여행했던 프랑스와 다르게 무언가 정돈되고 관리한다는 느낌이 든다.
둘이었던 우리가 홀로 낯선 여행지를 찾아 떠나고 말았다.
테르미니역을 건너 약 4분 거리
자신의 숙소로 체크인을 하는 희수
짐을 숙소에 풀어 놓고, 치안이 좋지 않다는 로마의 밤거리를 맥주를 사기 위해 걸어본다.
생각보다 거리가 정돈된 느낌.
26일간의 여행이 끝나면 자신 역시 이 거리처럼 조금은 정돈되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란 생각과 함께 배신감이 몰려온다.
숙소 옆 작은 슈퍼마켓에서 사 온 페로니(Peroni) 캔맥주 하나와 레몬 향이 달콤할 것 같은 페로니 병맥주 한 병을 침대 옆 낡은 협탁에 내려놓았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과 유리병의 촉감이 로마의 1월 공기만큼이나 낯설었다.
우선 목을 축이고 싶어 병맥주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희수는 멈칫했다.
병목을 감싼 금색 포장지 위로 매끈한 뚜껑이 보였다. 병따개가 없었다.
"하... 진짜 되는 게 없네."
입술 사이로 자조 섞인 탄식이 새어 나왔다. 숙소 방 안 어디를 뒤져봐도 병따개는커녕 흔한 티스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방 속 자물쇠는 서너 개나 챙겨왔으면서, 정작 자신을 위로해 줄 맥주 뚜껑 하나 따지 못하는 현실이 기가 막혔다.
이 병맥주를 따기 위해 다시 낯선 밤거리를 내려가 "아프리보틀(Apribottiglie)?" 하고 묻고 다닐 기운조차 없었다.
결국 희수는 허탈하게 캔맥주를 땄다. '칙-' 하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날카롭게 울렸다. 미지근한 캔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참아왔던 한국에서의 기억이 쌉싸름한 거품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희수의 세계는 찬란했다. 독립 큐레이터로서 2년 넘게 공들인 전시 <잊혀진 것들의 부활>의 최종 PT를 마친 날, 민석은 그녀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희수야, 고생했어. 이번 전시 끝나면 우리 이탈리아 가자. 네가 노래를 부르던 피렌체 두오모에서 나랑 같이 노을 보자."
그의 달콤한 약속은 거짓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와 함께했던 시간과 사랑 자체가 희수의 기획안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한 밑밥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시 확정 공고가 나던 날, 당선자 명단에 적힌 이름은 강희수가 아닌 김민석이었다.
민석은 희수가 밤새워 쓴 해외 유물 대여 목록과 도슨트 스크립트, 전시장 동선 시뮬레이션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했다.
배신감에 몸을 떨며 찾아간 그에게 민석은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재단 쪽에서 네 경력이 너무 짧다고 해서 내 이름으로 올린 거야. 결과적으로 우리 둘 다 잘되는 일이잖아. 너 너무 예민한 거 알아?"
적반하장 격인 그의 태도보다 희수를 무너뜨린 건 일주일 뒤 들려온 소식이었다.
민석이 전시를 지원해 준 재단 이사장의 조카와 결혼한다는 소문.
민석에게 희수는 함께 미래를 꿈꾸던 파트너가 아니라,
그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밟고 지나가야 할 가장 쉬운 계단에 불과했다.
캔맥주를 쥐고 있던 희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쁜 놈… 진짜 나쁜 놈."
파리 올림픽이 있던 2년 전 여름
민석과 함께 프랑스를 여행할 땐 세상이 온통 로맨틱한 파스텔 톤이었다.
평년보다 더웠던 프랑스였지만 그럼에도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은 더움보단 따뜻함을 주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홀로 남겨진 여행의 시작인 비오는 1월의 로마는 무채색의 거대한 돌무더기 같았다. 11시간의 경유와 긴 비행 끝에 도착한 이곳에서, 희수가 마주한 첫 성공은 고작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 하나를 따는 것뿐이었다.
병따개가 없어 따지 못한 레몬 맥주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꼭 지금의 자신 같았다.
겉은 화려한 이탈리아 여행자 같지만, 속에는 누구에게도 열어 보여주지 못한 상처와 울분이 가득 차 터지기 일보 직적인 상태.
캔맥주 한 모금을 삼키며 희수는 침대 맡에 둔 책, 《냉정과 열정 사이》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수없이 읽어 모서리가 헤진 이 책은 아오이의 시점이 담긴 Rosso(빨강) 편이었다.
민석에게 선물 받았던 쥰페이의 Blu(파랑) 편은 한국을 떠나기 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과거를 회상하는 남자의 낭만 따위, 지금의 희수에겐 사치이자 기만이었으니까.
희수에게 이 책은 유년의 문장이었다.
부모님의 이혼 후, 차가운 공기만 감돌던 집을 떠나 할머니의 낡은 빌라로 보내졌던 여덟 살.
할머니는 인자했지만 늘 고단했고, 학교에서 희수는 말 없는 아이, 부모 없는 애라는 낙인이 찍힌 채 섬처럼 떠돌았다.
운동장의 시끌벅적한 소음으로부터 도망쳐 들어간 학교 도서관의 구석자리,
그곳이 희수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외롭고 자신만의 철옹성을 구축한 열 여덟의 희수가 우연히 동네 도서관, 그곳에서 운명처럼 이 소설을 만났다.
비 내리는 밀라노의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고독을 견디는 아오이.
그녀의 서늘한 외로움은 희수의 것과 꼭 닮아 있었다.
아오이가 서른 살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에서 준폐이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붙들고 십 년을 버텼듯, 어린 희수도 다짐했다.
'나도 서른이 되면, 이 지독한 외로움을 끝내줄 누군가를 저 붉은 지붕 아래서 만날 수 있을거야. 조금만 견디면 돼'
그렇게 피렌체는 희수에게 약속된 구원의 장소가 되었다.
민석을 만났을 때, 그녀는 드디어 그 약속된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민석은 희수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너를 더 특별하고 단단하게 만든 서사"라고 치켜세웠고, 희수는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편이 생겼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가 훔쳐 간 건 기획안뿐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걸어 지켜온 희수의 유일한 희망, 사람에 대한 마지막 신뢰마저 그는 무참히 짓밟았다.
다시 눈앞의 현실로 돌아왔다.
로마의 안락한 숙소, 한국과 다르게 냉기가 흐르는 호텔 방 안, 병따개가 없어 따지 못한 레몬 맥주병.
준페이가 없는 아오이는 그저 고독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희수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손으로 쓸며 눅눅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