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부서진 채로, 로마

인생의 쓴맛은 어쩔 수 없어도, 커피만큼은 달게

by 달보노

로마의 1월은 비수기라지만 바티칸만큼은 예외였다. 거대한 성벽을 따라 끝도 없이 늘어선 줄을 보자 희수는 숨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의 소음과 가이드들의 색색의 깃발이 뒤섞인 광경은 희수의 복잡한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준오는 능숙하게 사람들을 정렬시키며 곁에 서 있던 이탈리아 중년 여성 한 분을 소개했다. “이분은 루치아 씨입니다. 이탈리아 법규상 한국인 가이드 혼자서는 투어가 불가능해서 오늘 저희와 함께하실 현지 가이드분이세요. 여권 확인이 필요 없는 티켓을 소지한 분들은 루치아씨를 따라 먼저 입장하실 겁니다.”


준오는 명단을 확인하며 여권확인이 필요한 그룹과 아닌 그룹을 나누기 시작했다. 여권이 필요없는 사람들은 루치아를 따라 먼저 인파 속으로 사려졌고, 희수는 여권을 지참해야 하는 줄에 남아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느덧 희수의 차례가 되어 여권을 건네자, 명단을 체크하던 준오의 펜 끝이 잠시 멈췄다.


“아, 95년생이시네요.”

준오가 고개를 들어 희수를 바라본다.

“저랑 동갑이네요. 여기서 동갑내가 힌국인을 만나니 반갑네요.”

준오는 여권을 돌려주며 처음으로 사무적인 미소가 아닌, 짧지만 다정한 온기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희수는 동갑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준오의 깃발을 따라 성벽 안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11시간의 비행과 긴 경유시간, 그리고 6시간 반의 비행과 어젯밤의 고독이 준 피로감이, 준오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조금씩 걷히는 기분이었다.


바티칸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몰려든 인파를 뚫고, 준오는 투어 일행을 이끌고 탁 티인 정원으로 향했다. 솔방울 조각상이 크게 자리잡은 솔 광장(Cortile della Pigna

)의 한 편, 준오는 햇살을 등지고 서서 자신의 태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자, 여러분. 시스티나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엄격하게 정숙을 유지해야 하고 사진 촬영도 금지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시스티나 성당 내부에 들어가기전에 여기서 미리 꼭 알아야하는 설명을 좀 드릴게요.”


준오는 태블릿 화면에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그림을 한 점 띄웠다. 아담과 신이 손가락 끝을 맞대기 직전의 찰나의 모습. 희수가 도서관 화집에서 수백 번은 보았던 그 그림이었다.


“이 작품 많이 보셨죠? 혹시 이 작품의 제목을 알고 계실까요?”

투어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천지창조라고 말하며 준오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흔히 이 그림을 천지창조라고 부르죠? 사실 일본식 번역이 굳어진 잘못된 명칭입니다. 정확히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라고 불러야 해요. 미켈란젤로가 그린 창세기 시리즈 9개 장면 중 하나인 아담의 창조가 너무 유명해져서 전체의 제목처럼 불리게 된 거죠. 그리고 또 하나, 이건 벽에 그린 벽화가 아니라 저 높은 천장에 그린 천장화입니다.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가 4년동안 고개를 뒤로 젖힌채 중력과 싸우며 일궈낸 고통의 산물이죠.”


준오가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툭 치더니, 가장 유명한 장면인 아담과 신의 손가락이 맞닿을 듯 말 듯한 부분을 최대치로 확대했다.


“여기 두 손가락 사이를 자세히 보세요. 맞닿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미세하게 떨어져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1센티미터도 안 되는 찰나이 간극에 인류의 운명을 담았죠.”


준오의 목소리가 수신기를 타고 나직히 들려왔다. 그는 화면 속의 여백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에게 영화 E.T.의 포스터로 더 익숙한 구도죠? 외계인과 소년이 손가락을 맞대며 교감하는 그 유명한 장면의 모티브가 바로 이 그림이에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손가락이 맞닿으면 감정의 스파크가 일어나지만, 미켈란젤로의 원작은 끝내 닿지 않아요. 신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지만, 아담은 아직 손가락을 펴지 않은 채 나른하게 누워 있죠.”


희수는 화면 속 그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도서관 화집에서 이 그림을 수 백번도 넘게 보았을 때 희수는 신과 아담의 손가락 사이의 간극이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부재 속에 홀로 남겨진 자신과 세상 사이의 거리, 혹은 누군가에게 끝없이 닿고 싶어도 끝내 닿지 못했던 외로움의 두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민석과 사랑에 빠졌을 때, 희수는 비로소 그 간극이 메워졌다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와의 만남은 영화 E.T.에서처럼 뜨거운 교감이 일어났고, 손가락 끝이 맞닿는 순간 자신의 불완전한 세계가 마침내 그에게서 구원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석은 그 닿아았던 손을 무참히 뿌리치고 희수가 쏟아넣은 모든 것을 가로채 사라졌다.


‘결국, 닿아있던 게 아니라 닿아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 뿐이었을까.’


희수는 쓴 웃음을 지었다.

배신의 상처는 그 미세한 간극을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거리로 벌려놓았다. 이제 그녀에게 그 거리는 누군가로부터 교감을 기다리는 설렘이 아니라, 다시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닿지 않겠다는 서글픈 방어기제였다.


“미켈란젤로는 말하고 싶었을 거예요. 구원은 신이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손가락을 펴서 그 간극을 메우려는 의지를 보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요.”


준오의 목소리가 다시 희수의 상념을 깨웠다.


“닿지 않았기에 오히려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은거죠. 가이드 생활을 하다보면 참 다양한 분들을 만나요. 저마다 마음속에 메우지 못한 빈틈과 사연 하나씩은 품고 이 먼 로마까지 오시더라고요.”


준오가 깃발을 고쳐 잡으며 일행 전체를 훑어보다, 찰나의 순간 희수의 눈과 마주쳤다. 준오는 그녀의 사연을 알 리 없었지만, 그 다정한 눈빛은 마치 희수의 비밀스러운 간극을 어림잡아 읽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 계신 여러분도 오늘 이 천장화를 보면서 내 마음속의 간극을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메우고 싶은지 꼭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내부로 들어가면 한동안 화장실에 가거나 쉬기 어렵습니다. 여기 카페테리아에서 잠시 20분 정도 자유시간을 드릴게요. 아침식사 못 하신 분들은 여기서 가볍게 요기라도 하세요. 이탈리아에 오셨으니 에스프레소도 한 잔 드셔보시고요.”


준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행은 흩어졌다.

희수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비어버린 속을 달래려 카페테리아 줄에 섰다. 진열대에는 투박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가득했다. 거장의 이름을 딴 미켈란젤로 샌드위치와 에스프레소 한 잔을 받아 빈자리에 앉은 희수는 한국에서 마시던 얼음 가득한 아메리카노와 전혀 다른, 작고 진한 에스프레소를 조심스럽게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윽…”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혀끝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는 지독하게도 썼다. 희석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고통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한국의 아메리카노가 일상을 버티게 하는 음료였다면, 이 에스프레소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쓴맛 그 자체였다. 익숙해지지 않을 이 맛이 꼭 지금의 자신의 처지 같아 희수는 억지로 샌드위치를 씹어 삼켰다.


옆에서 설탕 두 봉지를 털어 넣으며 잔을 젓던 준오가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적응 안 되시죠? 저도 7년째인데 이 쓴맛은 도저히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전 인생의 쓴맛은 어쩔 수 없어도 커피만큼은 제 의지로 달게 만들어 먹습니다. 희수 씨도 너무 정직하게 그 쓴맛 다 견디지 마세요.”


준오의 실없는 듯 다정한 농담에 희수는 한참이나 설탕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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