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부서진 채로, 로마

피에타, 나를 가련히 여기줄 한 사람

by 달보노

휴식이 끝나고 본격적인 내부 투어가 시작되었다. 준오는 투어 일행을 이끌고 회화관(Pinacoteca)으로 향했다.


“자, 여기를 보세요. 라파엘로의 진품 세 점이 이렇게 나란히 걸려 있는 곳은 전 세계에서 여기뿐입니다. 특히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변용>은 그가 서른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마지막 유작이죠.”


희수는 라파엘로의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상단의 찬란한 빛과 하단의 어두운 소란이 공존하는 그림.

어린 시절 도서관 화집에서 보며 눈물지었던 그 조화로움이 눈앞에 실재했다. 민석이 빼앗아 간 기획안 속에도 이 그림에 대한 자신의 열망은 가득했었다. 하지만 준오의 설명은 희수의 깊은 곳을 건드렸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서른일곱의 나리와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열에 시달리며 죽어가던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이 그림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떼지 못하는 눈으로 바라봤대요. 아마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그가 마주한 건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고 싶은 간절함이었을 겁니다.”


준오는 태블릿으로 그림의 하단을 가리켰다. 거기엔 눈동자가 뒤로 넘어간 채 발작을 일으키는 소년과, 그를 안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


“여기 아래를 보세요. 신에게 구원받고 싶어 울부짖는 병든 소년과 절망에 빠진 가족들이 보이죠? 그 위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그리스도가 떠 있고요. 라파엘로는 자신이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도, 그림 속 소년에게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에 가장 완벽한 질서를 선물해주고 싶었던 거예요. 혼란스러운 세상을 어떻게든 아름다운 질서로 묶어내려 했던 그의 의지가 느껴지시나요?”


아름다운 질서라는 단어가 희수의 가슴을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민석과의 일 이후, 희수의 세계 속 질서는 무너졌다. 믿었던 사람, 자신을 갈아 넣었던 기획안과 더 나아가 미래까지 모든 것이 그림 속 아픈 소년처럼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었다. 그 소란 속에서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한 채 홀로 떨고 있는, 죽어가는 라파엘로가 남긴 그 빛이 수신기를 타고 흐르는 준오의 따스한 목소리와 겹쳐져 희수의 시야를 뿌옇게 가리었다.


희수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입술을 깨물었다. 그림 속 소년을 구원하려 빛을 그려 넣던 라파엘로의 손길이, 마치 민석에게 난도질당한 자신의 기획안과 찢긴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당신도 이 그림 속 소년처럼 아팠군요. 죽어가는 순간에도 이토록 간절하게 빛을 붙잡고 싶었을 만큼..’


화집 속에 갇혀있던 평면적인 지식의 세계가, 한 예술가가 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부어 만든 복원된 세계가 되어 희수 앞에 실재했다. 민석이 가로챈 것이 그저 종이 위에 휘갈겨진 몇 줄의 아이디어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거장의 숨결 앞에서 느끼는 압도적인 전율과 감동만큼은, 세상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오직 희수만의 것이었다.


수신기 너머로 작게 들려오는 준오의 숨소리가 희수의 떨리는 어깨를 가만히 다독이는 듯했다. 희수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그림 상단의 찬란한 빛 속으로 자신의 상처를 아주 잠시 맡겨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여러 그림과 방을 거쳐 현대 종교 미술관의 한쪽 벽면에 일행은 도달했다. 그곳에는 화려한 르네상스의 색채들 사이에서 기묘할 정도로 서늘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작은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빈센트 반고흐의 <피에타>였다.


“자, 여기는 고흐가 그린 <피에타>입니다. 많은 분들이 바티칸에 고흐의 작품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시더라고요.”


준오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백했지만, 희수의 눈앞에 펼쳐진 고흐의 푸른색은 마치 그녀의 오래된 일기장 속 습기 찬 페이지를 들춰낸 것 같았다. ‘피에타(Pieta)’, 가련히 여기소서. 그 단어가 가슴에 닿는 순간, 그림 속 예수의 얼굴 너머로 아주 오래된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엄마의 외도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던 날의 그 서늘한 공기.

도망간 엄마를 찾겠다며 전국을 떠돌던 아버지의 뒷모습. 그리고 할머니의 집 마루에 홀로 앉아 ‘네 어미를 닮아 팔자가 사나울 것’이라던 차가운 눈총을 견뎌내던 꼬마 희수.


그 아이에게 세상은 닿을 수 없는 신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 사이의 간극이었고, 가난은 털어낼 수 없는 곰팡이였다. 학창 시절 친구들의 배신으로 화장실 칸에 숨어 도시락을 먹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희수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대신 책장을 넘겼다.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공부뿐이라 믿으며, 닳아빠진 참고서 위에 자신의 미래를 덧칠하고 또 덧칠했다.

악착같이 매달린 끝에 입사한 곳은 업계 1위의 광고 기획사, 성운기획이었다. 화려한 커리어와 세련된 사람들.

희수는 그곳에서 자신의 초라한 과거를 감추기 위해 누구보다 날카로운 기획력을 갈고닦기 위해 노력했다.

숫자 하나, 폰트의 굵기, 소비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단 한 줄의 카피까지.

빈틈없이 꽉 짜인 기획만이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밧줄이라 믿으면서.

그녀는 기획서만큼은 늘 업계에서 모범답안이라 불렸고, 희수는 그 차갑고 견고한 자신만의 벽 뒤에 자신의 초라한 상처들을 숨겼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숫자와 카피들은 그녀가 세상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가장 높은 담이었다.


하지만 민석은 그 높은 담을 억지로 넘으려 하지 않았다. 그눈 성벽 아래서 무력시위를 하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성벽 틈새로 스쳐가는 바람처럼 아주 서서히 무해하게 희수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연이은 야근에 눈이 뻑뻑해진 희수가 텅 빈 사무실에서 마지막으로 모니터를 껐을 때, 언제나처럼 그녀의 책상 위에는 따뜻한 커피와 짧은 메모가 놓여있었다.


“희수 씨, 오늘 기획안 정말 멋졌어요. 근데 나는 희수 씨가 만든 결과물보다, 기획안 만드나라 잠 못 잔 희수 씨가 더 걱정되네요. 조그만 쉬면서 해요. 희수 씨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평생 ‘네가 더 잘해야 한다’는 할머니의 가시 돋친 말과 ‘살아남으려면 더 독해져야 한다’는 세상의 강요 속에서 살아온 희수에게 그녀의 결과물이 아닌 지친 자신을 걱정해 준 사람은 민석이 유일했다. 그 다정하고 따스했던 배려에 희수는 평생을 견고히 다져온 담의 안쪽부터 서서히 녹여버렸다.


사랑받고 싶다는 본능적인 갈증이 이성을 앞질렀고, 스스로 성문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10년을 버텨 일궈낸 대형 프로젝트의 내용을 공유했던 건, 그가 내민 온기에 대한 보답이자 그와 함께할 미래에 대한 가장 순수한 투자였다. 그러나 민석은 희수가 열어준 성문을 통해 들어와 그녀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무너뜨렸다.


“고흐는 이 그림을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렸습니다. 발작과 환청에 시달리며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고 느꼈던 시기였죠.”

준오의 목소리가 과거의 파편 속에 침잠해 있던 희수를 다시 현실로 불러 세웠다.


“하지만 그는 죽은 예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찢긴 자신을, 성모 마리아가 아니, 세상의 어떤 온기가 가련히 여기며 안아주길 바랐던 겁니다.”


희수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가방 끈을 꽉 쥐었다. 고흐의 거칫 붓질은 꼭 희수가 살아온 굴곡진 삶의 궤적 같았다. 준오가 희수의 과거를 알 리 없었지만, 그가 읊조리는 ‘복원’과 ‘자비’라는 단어는 민석의 배신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매정한 매질과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던 어린 시절의 희수의 상처를 조용히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나를 가련히 여겨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어쩌면 희수는 평생 누군가에게 이 ‘피에타’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서, 아빠에게서, 혹은 친구나 민석에게서.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온전히 안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낯선 로마의 미술관에서 고흐가 스스로를 예수에 투영해 그린 이 푸른 그림이 희수를 위로해주고 있다.


괜찮다. 그 고통조차 너의 일부라고.


준오가 깃발을 고쳐 잡으며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흐에게 이 작업은 스스로에게 베푸는 최후의 자비였을 거예요. 여러분도 오늘만큼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오직 고생하며 여기까지 온 자기 자신을 가장 가련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희수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준오의 등을 바라보았다. 7년 전 로마로 건너와 이 쓴 커피를 마시며 버텼을 그 역시, 어쩌면 자신과 닮은 종류의 고독을 알고 있는 걸까. 희수는 고흐의 푸른빛을 마음 깊숙한 곳에 인장처럼 찍어 누르며, 이제는 조금 더 무겁고도 단단해진 발걸음으로 성벽 깊숙한 곳을 향해 걸음을 뗐다.

작가의 이전글03. 부서진 채로, 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