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3.
조직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고 그것이 성과로 드러나는 것이 조직이 잘되는 길이고 발전할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종수와 현정은 자신들이 여기에 오래 있을수록 스스로의 가치가 바래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미 3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윗선을 잡고 실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삐뚤어진 시선과 근거 없는 판단으로 인해 도는 소문들이 가시가 되고 칼날이 되어 마음속에 무수한 상흔을 남겼다.
비슷한 상처를 경험했지만 종수와 현정은 그 상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은 동일했지만 종수는 자신의 상처를 묻어두고 회피했다. 현정은 그 상처를 드러내서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 했다.
"이번 주 금요일에 부서 사람들하고 원장님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기로 했어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그 자리에서 결정될 것 같아요. 사과 안 하고 넘어가는 건 용납 못할 것 같아요."
"그렇게 결정하시기까지 고민도 많으시고 생각도 많으셨을 텐데 부서사람들과 만나는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어떤 판단을 하시던지 저는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감사해요, 종수님. 금요일에 만나고 또 연락드릴게요!"
의지가 가득 담긴 현정과의 통화가 끝나고 종수의 마음속에서는 존경심과 부러움이 동시에 올라왔다. 종수는 현정과 병원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회상했다. 현정은 퇴직하기 며칠 전에 복도에서 만난 종수를 붙잡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물었다. 종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점심시간에 외부 카페에서 보자고 하고 생각을 정리해 봤다.
'저런 상황에서 나라면, 저런 생각이 들 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종수는 올바른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면'이라는 전제부터가 틀렸던 것이다. 현정은 자신과는 달랐다. 그래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카페에서 이야기하면서 종수는 확신했다. 현정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답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 했다. 종수는 자신의 역할이 현정의 확신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결국 현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종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前) 직장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전하려고 불편한 만남을 잡은 현정의 용기가 부러웠고 생각을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행동력에서 존경심이 들었다. 자신이 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아서 속 시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못하는 이유를 본인 자신이 잘 알고 있기에 현정과의 통화 후 유난히 스스로가 못나 보이는 종수였다.
종수는 지금 직장에 취업하기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대한민국 취업준비생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이도 서른이 넘고 만나는 여자친구와 결혼을 꿈꾸고 있는 상황에서는 조급함이 더 생길 수밖에 없었다. 몇 년간 여러 공기업과 서울에 있는 회사에 자기소개서를 수십 장 써서 몇 차례 면접까지 가기도 했지만 종수는 그 이상을 넘어보질 못했다.
그러던 중 유일하게 최종합격이 되어 온 이곳에서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만한 일을 벌이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종수는 문득 현정의 모습에서 어떤 장면이 하나 떠올랐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장면 중 일명 '퇴사짤'로 유명해진 장면이 있는데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각박한 직장생활 속에서 더럽고 치사해서 직장을 그만두는 과감한 퇴사짤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는데 종수의 머릿속에서 하늘 높이 사라지는 캐릭터의 모습과 현정의 모습이 겹쳐졌다. 금요일이 되면 모든 근심과 걱정까지 사라지는 통쾌함을 현정은 느끼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목소리로 전화가 올까. 종수는 병원 뒷마당 나무에 한참을 서 있다가 자신의 일상이 당분간은 변함없을 거라는 기대감 없이,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느끼며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