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 자리에서

by 해보름

며칠 전,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영 수업을 들으러 지역 수영장에 갔다. 수업은 늘 같은 레인에서 열렸다.

그날은 강사가 조금 늦었다. 우리는 수업이 취소된 줄 알고 잠시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새로운 강사가 나타났다. 기존 강사가 다른 일을 맡게 되어 교체되었다고 했다.


수업을 시작하려는 순간, 우리가 사용하는 레인에서 한 남성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강사는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수업이 있으니 다른 레인으로 옮겨달라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수업 안내 표시도 없었고, 이곳은 공공시설이며, 자신은 늘 이 레인에서 수영해왔는데, 왜 자신이 옮겨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과연 다를까?


내가 이미 익숙해진 자리,

내 루틴이 된 자리,

내가 먼저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자리에서는

나 역시 쉽게 움직이고 싶지 않아 하지 않을까.


구약성경 민수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 38년을 지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요단강 동쪽의 땅을 정복한 뒤,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그 땅이 마음에 들었다. 가축을 기르기에 좋고, 이미 확보한 땅이었다.


그들은 모세에게 말했다.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이곳에 머물게 해달라고. < 민수기32:5 >


그때 모세가 묻는다.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민수기 32:6>"


이 장면은 단순히 전쟁 참여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공동체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일부가 먼저 안주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미 괜찮아진 자리.

이미 확보한 안정.

이미 누릴 수 있는 평안.

그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


생각해보면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광야를 함께 걸었고, 전쟁에도 참여했다.

다만 이제는 “여기까지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마음이 낯설지 않다.

나 역시 삶이 조금 안정되면

공동체의 짐을 함께 지기보다

그 안정 속에 머물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따라온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괜찮음’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홀로 만들어낸 결과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기도와 희생,

보이지 않는 수고 위에 세워진 것일까.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지금의 여유와 안전도

완전히 나 혼자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 괜찮아졌을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요단강 동쪽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와 함께 강을 건널 것인가.


머무는 것이 항상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머무름을 선택하는 순간, 누군가는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괜찮으니, 상대가 괜찮은지 먼저 묻는 것.

내가 여유가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주는 것.

내가 안전하니, 누군가의 짐을 함께 들어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요단강을 함께 건너는 방식이 아닐까.


흐르지 않는 것은 결국 정체되고, 정체는 서서히 생명을 잃는다.

겸손한 마음에 머무는 은혜 (10).png


오늘 나는 묻는다.

'나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나는, 함께 건너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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