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분에 대해 아무 앙금이 없다. 오히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감사할 뿐이다.
단백질 위주로 요리를 해주신 덕분에 내 키가 중학교 때 확 커서 우리 형제들 중에 제일 크고(오빠는 아버지보다 작다) 건강하다.
배포가 크시고 사람들을 좋아하셔서 우리 집에 항상 동네사람들이 북적됐다. 그 영향을 받았는지 나도 결혼하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서로 부대끼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독립적이시고 의욕이 넘치셨다. 나도 그 10대에 새어머니의 성격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하나 둘 배우게 된 것 같다. 내 친엄마는 많이 반대의 성격이셨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여자여자하고 소극적이셨고 순종적이 셨었다.
그 새어머니가 나 20살 때 한국으로 떠나셨다.그 당시 우리 가족은 다 남미 아르헨티나로 이민 와 있었고 이런저런 비즈니스를 하며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다.
처음에는 한국방문하면서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의아해했다. 그만큼 나에게도 미련이 없어 보였다. 10년 동안 우리 집에서 본인보다 12살 많은 영감과 말 안 듣는 어린 딸이랑 살면서 본인의 빚을 다 갚으시고 또 나름 새 출발 하실 밑천도 마련하시더니 자기를 놔달라고 한 것 같다. 나이가 70이 다 돼가는 아버지에게, 점점 억센 마누라에게 기를 못 피시던 아버지는 이번에도 나에게 물어보셨다.
"네 어머니가 한국으로 들어간다는데 아예 갈 것 같다. 네 생각은 어떠냐?"
나는 두 분이 10여 년을 아웅다웅 다투는 모습에 질려서 이제는 새어머니를 놔주라고 했다.
"아버지는 나랑 살면 되잖아요, 어머니는 친정식구도 다 한국에 있는데 가라고 하세요."
만약 그때 내가 아버지에게 새어머니를 붙잡으라고 하면 상황이 많이 바뀌었을까?
아버지는 그렇게 두 번째 와이프랑 생이별을 하고 나서 1년도 못돼 간염으로 돌아가셨다. 아마도 그리움과 상사병?을 술로 달래시다 탈이 난 게 아닌가 싶다. 그것이 가장 미안하고 아버지에게 못 해 드린 것 같아서 후회된다.
나중에 내가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떻게 연락이 됐는지 새어머니가 전화를 한번 주셨다.
"선경아, 미안하다. 너 결혼식도 못 가보고.. 나를 용서해 주라. 네 아버지에게도 너무 죄송하고.. 그렇게 바로 돌아가셨다면서.. 내가 죄인이다."
그 전화 한 통으로 10년 동안 미워하고? 싫어했었던 그분을 다 용서했다.
그리고 내가 자식을 낳고 키울 때마다 많이 생각났지만 연락을 아예 끊어버리신 분이라 안타깝기만 했다. 다른 분이랑 또 살림을 합쳤다는 얘기를 들어서 인지.. 새로운 분에게 내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려울 테니 점점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이해가 됐다.
내가 낳은 딸도 가끔 말 안들으면 밉고 짜증이 났을 텐데.. 나는 그 새어머니에게 한 번도 스킨십을 한 적이 없고 받은 적이 없었다.
자식을 낳아 보지 않으신 분이라 그런지 성격이 너무 여장부 같아서 그런지 나를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새 남편의 자식처럼 대했다.
나도 예전부터 신데렐라, 콩쥐팥쥐 이야기를 많이 읽어서 그런지 새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나도 엄마도 되어보니 그 새어머니에게 참 많은 후회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그분에게 내 친엄마에게 대한 것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스킨십하며 달라붙었다면 그분도 나를 허물없이 대했을까?
중학교 때 내가 학원비를 삥땅치고 1달 안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저혼내는 시늉을 하며 새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고.
새어머니는 나를 대놓고 혼내지 못하고 쩔쩔 매기만 하셨다. 그러면서 "내자식이 아니라 내가 매를 들 수가 없다. 누가 보면 자기 자식 아니라고 막 때린다고 할까 봐.."
그때 나는 철이 들어 버렸다. 아.. 나는 다른 집 애들처럼 등짝 스메싱 같은 것을 받을 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