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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개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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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Apr 20. 2024

성난 사람들

악성 민원인을 고발합니다.

선생님! 학부모 전화 왔었어요.
지금 전화해 보세요.


부담임으로 종례를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실무사선생님이 호들갑스럽게 나를 불러 세운다. 대충 눈치로만 봐도 심상치 않은 민원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무사님은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주며 나에게 얼른 전화해 보라고 한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옆자리 선생님은 혹시 모르니 녹음도 하라며 나에게 조언한다. 번호를 입력하자 신호가 간다. 어떤 여자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00 중학교입니다. 전화하셨다고 해서 전화드렸는데요.

네, 제가 질문할 게 있어서요.
팝송 학습지에 문제가 있는데 시험범위로 들어간다고 하신 거 맞죠?

 실례지만 전화하시는 분은 어디신가요?

지금, '어디신가요?'라고 한 거 맞죠? 그게 할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말해.
공손하게 저는 00이고 앞반 영어선생이고 이렇게 밝히고 말을 해야지.
말하는 태도가 그게 뭐야? 감정적으로 말했잖아.
교육청에 민원을 넣어야 정신 차리겠어?
아니 오류가 있는 학습지를 내놓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학부모 서명이라도 받을까?



한동안 이어지는 폭언과 고성, 일방적인 공격에 정신이 혼미하다.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옆자리 샘의 녹음버튼을 누르라는 메모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생각도 나지않는다. 최대한 차분하게 격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정신줄을 부여잡으려 애쓰지만 소용없다. 막무가내로 계속되는 인신공격에 속수무책이다.


네. 실례지만 저는 흥분하고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금 말씀하신 그 부분은 담당 교사들과 협의 중에 있고 질문한 학생들에겐 해당 학습지는 시험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말이야. 학습지검토도 안 하고 애들한테 나눠주고 당신이 선생님이야?
3년 동안 내가 학습지를 봤는데 이런 학습지는 본 적도 없어. 이딴 걸 학습지로 내놓고 애들한테 달달외우게 하고 당신이 제대로 된 선생이야? 교육과정에 나오는 걸로 가르쳐야지. 그걸 자료라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던지 해야지 정신을 차리겠어?

어머님. 지금 저에게 협박과 인신공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학습지는 참고용이고 시험제출용으로 적합하지 않아 시험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공지할 예정입니다. 그 학습지는 교사용 지도서에 포함된 그대로 인쇄하고 배부한 것입니다. 말씀하신 부분은 체크하지 못하고 미리 공지 못한 점은 죄송합니다.

그럼 오늘 중으로 학생들에게 팝송은 제외할 거라고 공지하실 건가요?

네. 협의하고 진행할 예정입니다.



민원의 내용은 간단했다. 작은 따옴표하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고 그것이 시험범위에 들어갈 수 있냐고 해당 학습지를 시험범위에서 빼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실은 5분 전 같은 방법으로 전화를 한 한 남자의 민원내용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시험범위에서 팝송은 제외하는 것이었다. 원하는 데로 학생들에게 공지하겠다고 하자 민원인의 목소리는 바로 낮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민원의 내용은 그럴 수 있다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태도와 방법은 무례했다. 게다가 사가 수업과 평가에 대한 일체의 권한이 있는데 본인이 어떤 권리로 어떤 것을 시험에 넣고 뺄지를 강요한다는 말인가. 다시 생각하도 어이없는 일이다. 일단, 관리자 및 담당교사들과 협의하고 학생과 학부모에게 해당 팝송학습지를 시험범위에서 뺀다고 공지를 하고 마무리했다. 빠른 대처와 판단으로 상황은 잘 정리된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통화했던 여자의 격앙된 목소리와 거친 말들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나, 교사라는 사람은 이렇게 무력한 사람이란 말인가.




잘못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사람들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무차별 폭력을 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20년 교직생활의 평가는 작은 실수 하나로 패대기 쳐졌다. 대응할 말은 한참 뒤에나 떠올랐고 민원인의 인신공격적인 발언과 억지스럽고 비논리적인 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피곤에 지쳐 잠든 밤은 알 수 없는 것에 쫓기는 꿈에 시달려 자다깨기를 반복했다. 아침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이 나를 괴롭힌다. 왜 그 사람은 작정한 것처럼 일면식도 모르는 나를, 심지어 자신의 자식을 가르치는 나를  공격해야 했을까. TV에서나 보던 악성 민원인에게 맥없이 당하고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두 명의 비상식적인 사람의 행동은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의 일상을 흔들어놓는다. 주당 3 시수에 수행평가 2번에 지필평가 2번을 한 학기에 보는 일정은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다. 지필시험에 쫓기듯 진도를 나가는 수업, 충분히 영어를 즐기고 연습할 여유가 없는 수업, 그런 수업을 나는 원치 않았다. 올해는 묻지고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영어와 수학을 중간고사 (1차 지필고사)에 넣어야 한다고 통지받았다. 헉헉 거리며 100미터 달리기 하듯 달려온 지난 시간이 맥없이 멈춘 것만 같았다.




팝송을 가르치는 수만가지 이유

바쁜 진도에도 내가 팝송을 포기하지않는 이유는  수만가지다. 학습지를 풀거나 모둠활동을 할때 배경음악으로 한 과에 두곡씩 팝송을 틀어준다. 음악을 틀면 일단 아이들이 편안해한다. 눈으로만 익힌 영어를 귀로 입으로 따라하며 팝송으로 배우는 영어는 오감을 자극하는 수업이 되어 그 효과가 훨씬 크다. 자연스러운 발음과 억양에 노출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딱딱한 수업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선사한다. 음악과 함께 그 언어를 쓰는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고 귀에 익숙해진 음악은 나도 모르게 입으로 흥얼거리게 되고 그렇게 외워진 가사는 쉽게 잊혀지지않는다. 미련하게 이제서야 그 많은 이유를 미친 사람처럼 줄줄이 적고 있다. 애초에 그 사람은 나에게 팝송을 가르치는 이유를 물을 생각도 들을 생각도 안했겠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린 왜 이렇게 서로 예민하게 대치해야만 하는 걸까. 시험이라는 것이 지금 제대로 된 교육을 하도록 하고 있는 걸까. 악에 바쳐 소리쳤던 그 여인에게 나는 왜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저한테 왜 소리치세요?
저는 당신에게 공격의 대상이 아닙니다. 당신의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일 뿐입니다.
 저에게 이렇게 험한 말을 퍼붓고 나면
당신 마음은 편하십니까.



 때때로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분노의 화살은 엉뚱한 사람을 겨눌 때가 있. 그러나 당하는 사람은 당황스럽고 비참하기만 하다. 그리고 궁금하다. 왜 그래야만 할까. 도대체 화는 어디서 왔으며, 왜 그러는 것일까. 심한 충격을 받으면 나는 늘 이렇게 "왜"라는 질문에 나를 가둔다. 습관처럼 쓸데없는 잡생각에 사로잡혀 정신체력을 소비한다. 그런데 이런 나를 멈출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괜찮지 않다는 증거다.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한다. 나를 지켜야 한다. ' 근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이 나를 또 공격하면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참으로 무심한 시간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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