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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초등 육아

아이돌 덕질 뒷바라지

by 화요일
이제 한 시간 남았어요.
아빠, 엄마 티켓팅 준비해야 해요.



앗, 시작이다. 초통령(초등학생들의 대통령) 아이돌 '아이브'의 열성팬 막내딸의 명령이 떨어졌다. 콘서트 티켓팅의 치열한 클릭전쟁이 시작되었다. 예매 사이트에 10분 전 로그인, 콘서트 예매 화면을 켜두고 시간을 기다린다. 8시 9분 전, 8분 전,... 1분 전. 고!


589번째 입장 대기 중입니다.


빠른 손놀림에도 동시 진입은 실패, 그래도 1,000이 넘지 않은 숫자에 안도한다. 남편도 동시접속, 남편의 숫자가 더 빨리 줄어든다. 드디어 예매 사이트에 진입, 빠르게 자리를 선점하고 클릭한다. 아, 누군가 결제 중이라는 메시지, 몇 번을 들어갔다 나갔다 반복, 빠른 손놀림으로 10번 정도 재시도했다가 드디어 성공, 자리 하나를 구매하자 딸은 환호성을 지른다.


티켓가격이 10만 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라 구입 전 아이는 아빠랑 협상을 했다. 명절 때 받은 용돈을 그대로 아빠에게 주기로. 딸은 손해나 이득은 안중에도 없고 치열한 클릭전쟁에 성공해 티켓을 획득했으니 그저 기분이 최고다.



가방 싸기

티켓구입성공 후, 가방 싸기가 시작되었다. 콘서트 3, 4주 전인데도 매일 저녁 짐을 풀었다 샀다를 반복한다. 아이브 공식 응원봉을 먼저 챙기고 교환할 포토카드(포카)를 투명비닐백에 넣었다 뺐다 하며 상태를 체크한다. 당일 MD샵에서 쓸 용돈도 지갑에 두둑이 챙겨둔다. 한 달 전부터 가방을 싸놓고 매일 한 번씩 점검하고 다시 싸고 넣고 한다. 하루에 한 번씩 질리지도 않은지 유튜버가 생중계하는 것처럼 혼자서 뭐라고 종알거리면서 가방 싸는 일을 즐겁게 하고 또 한다.



셀프현수막 만들기

공연 3주 전쯤 되었으려나. 우드락이랑 색지랑 반짝이 등등을 사러 다*소를 가야 한다며 부산을 떤다. 퇴근길 아빠와 쏙닥쏙닥 통화를 하더니 바리바리 뭔가를 사 와서 꼼지락꼼지락 몇 시간 동안 뭔가를 하나 했더니 몇 시간 만에 근사한 응원판을 뚝딱 완성했다. 핑크에 보라에 테두리는 보석이 박힌 수제 응원판, 그 열정과 재주가 놀랍기만 하다.



여권, 신분증 꼭 필요해요

드디어 일주일 전, 내 아이디로 산 표라 가족관계증명서, 아이 여권, 내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매일 얘기한다. 하루 전에 챙기면 된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다. 실은 표확인보다. MD샵 입장에 필요하다고. 아니, 무슨 물건 사는데도 신분확인이 필요하냐. 참 알 수 없는 덕질의 세계다.


응원연습

아이브의 노래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응답을 하는 응원법을 유*브로 연습한다. 거실에서 방 안에서 폴짝폴짝 뛰며 신나게 연습하는 모습이 귀엽다.



당일 아침

다시 짐을 싼다. 기념품을 사려면 일찍 가야 한다며 부지런을 떤다. 오후 6시 공연인데 아침 9시부터 빨리 가야 한다는 그녀의 요구에 피곤함이 몰려온다. 김밥을 싼다. 길거리에서 긴 기다림이 예상되므로 바리바리 싸서 가방에 넣고 출발한다.



2시간 30분 MD샵 대기

때 이른 추위에, 단풍이 이쁜 가을날, 남편은 긴 행렬에 줄을 섰다. 나는 근처 병원에 가서 재빠르게 침을 맞고 체력을 충전하고 뒤늦게 합류했다. 저 긴 줄에 서있는 사람들을 누군가의 아빠이고 또 엄마일 텐데 그들의 노고에 왠지 모를 동질감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소시지에 핫도그에 간식을 공수해 남편에게 건네주고 길고 긴 대기를 이어갔다. 내가 줄을 서지도 않으면서 '이게 이럴 일인가'. 혼자 구시렁거려 보지만 이미 늦었다. 드디어 남편은 딸이 시킨 데로 이것저것 굿즈를 챙겨 사 왔다. 자랑스러운 그 모습에 딸은 열광하며 깡충깡충 버선발로 아빠를 맞이한다. 대기하면서 지켜보니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다 비슷한 풍경. 한 가족이 모두 동원되어야 가능한 초등학생들의 덕질이다.


굿즈구입을 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길가 벤치에 자리를 잡고 편의점에서 뜨끈한 컵라면을 사 와 집에서 싸 온 김밥을 꺼내놓고 이제야 마음을 놓고 맛있게 먹는다. 하늘도 푸르른 가을날, 아이브 덕분에 가을 소풍을 나온 셈.


막내딸 덕분에 가을소풍 나왔네.
고마워~



포카교환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한숨 돌리니, 이제 포카교환하러 가야 한다고 딸내미가 새로운 오더를 내린다. 참으로 알찬 일정이다. 털레털레 딸 꽁무니를 따라 공연장 앞에 가니 넓은 공터에 빽빽이 들어앉은 사람들, 초5막내딸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작은 돗자리를 펴고 포토카드를 쭉 널어놓고 영업 중이다. 수줍은 우리 딸, 한참을 둘러보더니 포카 판매 중인 작은 소녀 곁에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이거랑 교환할 수 있을까요?


딸이 갖고 싶은 카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상대가 오케이 하고 딸은 자기의 포토카드첩을 꺼내서 건넨다. 상대도 마음에 드는 카드가 있으면 1:1로 교환이 성립된다. 그 표정이 어찌나 진지한지, 귀여운 그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다. 딸은 마음에 드는 포카 두 장을 거래로 얻어내고는 뿌듯한 표정이다. 이런 장터가 자율적으로 열리고 물건거래가 된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드디어 입장!

덕후들의 예절샷이라는 ~~

4시 30분부터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30분 정도 남았다. 난 달달한 커피가 시급했다. 근처 카페를 찾아 드디어 앉는다. 디카페인 커피가 없어 핫초코로 대신 주문하고 곧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한숨 돌린다. 딸은 공연장에서 쓸 응원봉이며 공연을 같이 볼 이름 모를 다른 팬들을 위한 간식과 포카도 챙긴다. 아이돌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다.




딸은 아빠와 같이 공연장으로 간다. 제법 무거워진 가방을 그 작은 몸으로 메고 가면서도 씩씩하기만 하다. 이제 두 시간 남짓 공연 끝나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남은 차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공원 산책도 하고 놀멍쉬멍 기다리는 동안 어느덧 끝날 시간이 다 되어간다. 8시쯤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러 간다. 공연장 밖에서도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 큰 경기장을 꽉 채우고도 밖으로도 퍼지는 열정의 무대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 소리를 같이 듣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공연 관람하는 어린이들 수만큼 대기 중인 부모들이다. 때 이른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는 그 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하다. 카페에 자리 잡길 잡했다며 스스로 위로하고 온기가 있는 카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공연은 종료시간을 20분이나 더 넘기고 끝이 났다. 딸은 상기된 얼굴로 돌아와서는 무료 나눔 받은 선물을 자랑하는 아이, 엄마, 아빠를 보자마자 상기된 얼굴로 물건을 보여준다. 일단 차를 타러 가자고 달래서 발길을 돌린다. 이 많은 사람들이 또 동시에 나가는 길이라 예상했던 데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조잘조잘 신이 나서 공연후기를 말하는 딸이 없었다면 정말 짜증 나는 시간이었을 거다. 30분 넘게 주차장 앞의 대기를 끝내고 집에 오자 10시. 기나긴 12시간의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



순수 초딩, 비싼 덕질

좋아하는 걸, 하고 싶은 걸 하게 하는 게 부모 된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라지만 아이돌덕질 뒷바라지는 비용도 많이 들고 체력도 필요한 고된 일임이다. 콘서트 티켓구입도 힘들고 가격도 비싸고 굿즈와 응원봉도 수시로 바뀌어서 사달라고 조르면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최대한 아이의 용돈을 모아 사고 싶은 것을 최소한 사도록 말은 하지만 팬심은 끝이 없다. 물건을 사모으는 게 팬심은 아닐진대 그걸 알기엔 순수한 어린아이들의 팬심을 이용해 자꾸 물건을 파는 업체들이 조금 밉다.



나 때는 말이야

그저 어떤 가수를 좋아하면 골방에 처박혀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운 좋게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재빠르게 녹음버튼을 눌러 한곡씩 모아 만든 카세트테이프, 기술은 조악하기만 해서 앞부분이 잘리거나 디제이의 소개멘트가 들어간 어설픈 녹음테이프를 만들곤 했다. 덕질이라는 건 그저 그 테이프를 듣고 또 들어서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듣고 라디오 방송에 신청곡 사연 써서 엽서로 보내던 것이 전부였던 90년대 우리 때 덕질이 아련히 떠오른다.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노래와 춤을 따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갖가지 비싼 굿즈, 포토카드를 사모으고 콘서트를 따라다니는 그야말로 럭셔리 덕질이다.



그래도 너를 응원해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르는 건, 나의 열정과 노력이 또 다른 것에 닿는 것이기도 하지.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따라 하면서 몸을 움직이고 노래를 듣고 신나게 즐겁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 뭔가에 빠져있는 것이 예술, 음악, 미술이면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든다. 현실의 어려움과 단조로움을 이겨낼 좋은 취미가 되기도 하고. 책 <회색인간>에서 매일 땅을 파고 반복되는 일만 하면서 회색빛 무채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고요히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사람, 이야기를 만들어 얘기해 주던 사람,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칙칙한 공동체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노래가 이야기가 그림이 그렇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더 좋은, 한번 맛보면 그것이 없던 때로 돌아가기 힘든 그런 것. 그것이 예술의 힘인가.


집에 와서도 온갖 덕질 굿즈를 널어놓고 뿌듯하게 바라보는 딸의 얼굴에서 새로운 활기를 엿본다.


엄마, 아빠! 오늘은 진짜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어요.



#라라쿠루13기

#4-1

#덕질

#아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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