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저녁 6시 3분, 나선의 시간을 마신 사람들
무용해 보이는 일들에 내 에너지와 시간을 쏟고 싶을 때가 있다. 자신의 할 일에만 골몰하는 고양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 온종일 넷플릭스를 틀어 놓는 일, 몸에 유익하지 않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일, 결국 쓰레기가 될 예쁘고 귀여운 물건들을 사 모으는 일, 결국 삶에서 예술은 무엇인지 정해진 답 없는 늦은 밤 이야기까지. 당장 현실에 도움이 될 만한 일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우리가 무용한 일들이라고 부르는 일들이 진정 무용하기만 할까. 이 질문을 하다 보면 생각나는 만남이 있다. 함께 코코아를 나눠 마시며 그림책을 나누던 그날 밤 말이다.
2022년 11월 4일 저녁 6시 3분. 몇몇 사람들이 동인천 한옥 책방에 모였다. 이름하여 ‘이상한 그림책 다과회’ 모임을 위해서다.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그림책을 무척 좋아한다는 점이다. 모임을 주최하신 그림책 활동가 선생님과, 오랜 세월 그림책 출판과 번역 일을 해오신 선생님, 그림책 테라피스트 두 명, 그림책 애호가 세 분, 그리고 서점 사장님까지. 모두 소개하고 싶은 그림책 1권씩 들고 한 자리에 모였다.
어둡고 한적한 주중 배다리 골목 위로 책방 불빛은 더욱 선명하게 반짝였다.
사장님은 갓 끓인 따끈한 코코아를 차례로 건네주셨다. 나도 조심스레 찻잔을 건네받았다.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고 마시는 코코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 필요했던 온기와 달큼함. 코코아는 참 신기하지. 복잡했던 오늘을 상관없게 만들어 버린다. 점점 코코아를 찾는 계절이 오고 있다.
모임을 연 선생님이 작고 노오란 책을 먼저 소개해 주셨다. 바로 그림책 「이상한 다과회」다. 모임은 바로, 이 그림책에서 연유했다.
책 속 주인공은 매년 11월 4일 오후 6시 3분에 모이는 이상한 다과회 초대장을 전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낸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열리는 이상한 다과회를 위해 모든 일을 제쳐두고 트란스발 성 앞에 모인다. 성안 숲 속 바위산에서는 천연 코코아가 솟아오르고 있다. 그들이 만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한 테이블에 앉아 그저 코코아를 나눠 마시는 일뿐이다. 일 년 만에 만난 그들이 실제로 얘기를 나눴는지, 나눴다면 어떤 얘기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코코아 시간이 끝난 뒤, 언제나 그랬듯 모두 각자 세상으로 돌아간다. 내년에 만나자는 알 수 없는 기약만을 나눈 채 말이다.
그들은 다시 코코아를 나눠 마실 수 있을까? 모든 일을 지켜보던 초승달은 그저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다시 만나자던 어릴 적 약속처럼, 대부분 기약 없는 만남들은 지키기보다 잊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사히 무용한 코코아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서로 안녕할 수 있기를. 아무 일 없이 다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실은 행운과 기적의 복합체라는 사실을 점점 더 알아간다.
이상한 그림책 다과회에서 우리는 각자 가지고 온 그림책을 읽었다. 그림책을 보고 어떤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는지, 떠오른 마음은 어떤지, 연상되는 또 다른 그림책은 무엇인지 함께 나눴다. 어쩌면 누군가는 무용하다 싶을 대화들이 깊고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알고 보면 우리네 일상은 대부분 무용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무용한 일들이 어쩌면 유용한 일들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차가운 계절, 코코아가 무용하면서도 가장 유용한 가루인 것처럼 말이다.
오늘 아침,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 글을 쓴다. 어쩌면 소수의 몇 명만이 읽는 글을 위해 하루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할애한다. 무용할 수 있지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가장 유용한 시간이다.
외롭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무용한 시간을 기꺼이 나답게 보내는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다. 그 나선의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 그림책 다과회에 가끔 들려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