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한 구석의 맛
지하철 4호선 쌍문역에 내린다. 이곳은 행정 구역상 서울 북쪽 도봉구에 위치해 있으며 위로는 의정부, 좌우로는 강북구와 노원구를 끼고 있다. 쌍문역은 1985년 지하철 4호선 개통 시 함께 조성된 초기 노선에 속하는 곳이라 역사가 매우 낡았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2020년 리모델링해 꽤 쾌적한 환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역사 곳곳에 어린 시절 보아 익숙한 만화 캐릭터 둘리와 친구들이 그려져 있다는 것인데, 설정상 둘리와 고길동 무리가 살던 곳이 바로 이곳 쌍문동이라고 한다.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둘리의 작가 김수정이 젊은 시절 쌍문동에서 자취를 했는데 살림살이는 어려워도 사람들이 다정하고 친근해서 아웅다웅해도 따듯했던 기억 이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미 고희가 지난 그가 젊었을 시절이니 지금으로부터 한 참 전의 이야기겠지만, 대부분의 수도 외곽 지역이 그렇듯 이곳도 도시 진입을 꿈꾸며 상경한 지방 사람들이 많아 서울의 주류 문화보다는 다분히 지역의 공동체적 정서가 남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울 같지 않은 서울’의 느낌, 만화가 김수정이 피부로 느꼈던 쌍문동의 정서가 바로 이런 지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이곳 쌍문역 주변 풍경도 여타 서울 역세권의 번화한 이미지와는 달리 다분히 80년대의 이미지가 남아있다. 고층의 현대적인 건물보다는 낮고 오래된 건물이 많고 출구 앞 노점과 좌판 상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도시에 상경한 청춘들이 바라보았을 쌍문동도 지금과 비교해 아주 생경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근래 방영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나 ‘오징어게임’의 배경으로 이 주변 일대가 등장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곳이 흡사 시간이 멈춘 것과 같은 서민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서울의 몇 되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막연한 짐작이겠지만 왠지 이 지역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살아갈 것만 같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하마터면 방문 목적을 잊을 뻔했다. 나는 역사 안에서 고개를 돌려 목적지인 4번 출구를 찾는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니 조금씩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해 내가 찾은 방향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함스브로트 과자점. 한눈에 봐도 퍽 오래되어 보이는 동네 빵집이다. 입구 한편에는 ‘제과 명장’이라는 작은 명판이 부끄러운 듯 숨어있다. 자식이 상을 받아 와도 이웃에 폐가 될까 티 내지 않았던 우리네 부모님 세대의 정서가 엿보인다. 간판을 살펴보니 상호명에 요즘 유행하는 베이커리, 바게트 등의 외래어가 아닌 과자점을 붙인 것도 특이하다. 물론 함스브로트라는 상호는 무척이나 이국적이긴 하지만. 두 언어의 비매칭이 주는 묘한 낙차가 흥미롭다. 함스브로트가 무슨 뜻일까 한참을 살펴보다가 다시금 제과 명장 명패에 있는 이름을 보고 답을 찾는다. Ham’s Brot(브로트는 독일어로 빵이라는 뜻이다). 즉 함 씨의 빵집인 것이다.
기대감을 가지고 제과점 안으로 든다. 제법 넓은 공간 곳곳에 빵이 펼쳐있다. 인테리어는 다소 예스럽지만 촌스러운 느낌은 주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내부를 돌며 빵 종류를 하나 둘 살펴본다. 이미 눈에 익숙한 소보로나 마늘빵, 팥빵 같은 것들도 있지만 일반 프랜차이즈 빵집과는 또 다른 느낌의 빵들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사전에 검색을 하고 왔기에 이 집에 어떤 빵들이 유명하다는 정보는 가지고 있다. 그중 이탈리아식의 판 프루토 빵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매진되었고 대신 다른 인기 메뉴라던 고구마 식빵은 수가 남아 있었다. 고구마 식빵 하나를 잡아들고 셈을 치른다. 거품이 가득 낀 요즘 빵집들과 비교해 다소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착할 때부터 허기가 있기도 했고 다양한 빵 향기에 취해 바로 시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내에 따로 구비된 테이블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입맛을 다시며 제과점을 빠져나왔다.
출입문 앞에서 초행인 티를 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동네 시장으로 이어지는 몇 개의 골목만이 보일 뿐 마땅히 앉아 빵을 먹을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도리 없이 나는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 마련된 빈 휴게 의자에 앉았다. 앉자마자 봉투를 열고 고구마 빵을 꺼냈다. 철끈을 푸니 한입 베어 물기도 전에 구수한 고구마 향이 코를 찌른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 앉아 있던 어르신들도 덩달아 나를 쳐다본다. 코로나 시기라 눈초리가 사나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딱히 그렇진 않아 보였다. 아마 그들도 이 익숙하고 고소한 향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을 것이다. 쏟아지는 시선에 겸연쩍게 살짝 눈인사를 했다. 악의 없는 그 얼굴들을 뒤로하고 썰지 않은 식빵을 그대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씹으니 고구마 맛이 강하다. 밀가루 반죽의 숙성시간이 좀 다르거나 혹 호밀을 썼나 싶을 정도로 식감이 무척 거칠다. 그러나 그것이 고구마의 특유의 맛과 향에 무척 잘 어울렸다. 이런 말이 실례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빵 자체는 그다지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다. 대신 구황작물이 가져다주는 뭔지 모를 아늑함이 있다. 이런 류는 넉넉할 때 입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는 빵이 아니다. 이것은 철저히 위장을 만족시키기 위한 빵이다. 나는 물도 없이 우적우적 빵을 집어삼킨다. 허기는 곧 가셨다.
배도 찼겠다 산책이라도 할 겸 공원을 찾다 보니 어느새 쌍문동에서 방학동까지 걷게 되었다. 이곳에는 지역 주민이 찾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이름도 다소 짓궂은 '발바닥 공원'. 이런 독특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인즉, 공원이 흡사 발바닥 모양으로 좁고 길게 늘어섰기 때문이란다. 사실 이 공원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데 1965년경부터 철거민 이주로 형성되기 시작한 집단 무허가 판자촌을 1998년부터 모두 철거해 조성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빽빽한 나무 수보다 개개인의 가슴 아픈 서사들이 먼저 빼곡하게 자리했던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도 시간이 퍽 흘러 이제는 지역 주민의 틈새 휴게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무 그늘이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한껏 한량 노릇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휴대용 오디오로 틀어 놓은 트롯 한 소절이 귀에 들려온다. 지금이야 트롯이 옛날 음악으로 여겨지지만 60년대만 해도 젊은 세대들이 듣는 신식 음악이었다. 덕분에 문득 떠오르는 노래와 이름이 있는데 여기 발바닥공원 근처는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제 교통비를 털어 당시 말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집까지 걸어왔다던 전태일. 동대문평화시장에서 이곳까지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족히 3시간은 걸렸을 텐데, 그 고된 노동 후에 빈속으로 한참 동안 집으로 돌아가던 그의 마음속에는 과연 무엇이 타고 있었을까. 상상하니 문득 섬광이 아른 거린다. 평소 전태일은 퍽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소풍이라도 가면 자신이 좋아하던 노래,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을 멋들어지게 부르곤 했다 한다. 그 가사를 살펴보자.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외롭고 슬프면 하늘만 바라보면서
맨발로 걸어왔네 사나이 험한 길
상처뿐인 이 가슴에 나 홀로 달랬네
내버린 자식이라 비웃지 말라
내 생전 처음으로 바친 순정은
머나먼 천국에서 그대 옆에 피어나리'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찾아 듣는다. 현악반주와 함께 진중한 최희준의 목소리가 울린다. 잘은 몰라도 전태일도 이런 그의 목소리를 따라 하고 싶었을 것이다(게다가 최희준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대학생 친구, 그것도 서울대 법학도가 아니었던가). 물론 정작 그가 따라하고 싶었던 것은 노래의 화자처럼 청춘의 기개 넘치는 모습이었겠지만. 나 또한 이 노래가 익숙한 것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맨발의 청춘’등의 성인가요가 방송되는 TV프로그램을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이다. 밤 10시, 잠이 막 밀려오는 시간대에 나지막이 들려오던 김동건 아나운서의 인사말 은 나의 노곤함을 배가하였다. ‘오늘도 변함없이 이 시간을 기다려주신 전국의 가요무대 가족 여러분. 이 자리에 오신 많은 방청객 여러분. 그리고 멀리 계시는 해외 동포 여러분, 해외 근로자 여러분. 지난 한 주 안녕하셨습니까?’ 문득 인사말에 누구 하나 빼놓지 않는 그러한 세심함과 다정함이 그립다.
노래를 들으며 다시 쌍문동 일대를 걷는다. 전태일의 집도 판자촌도 모두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된 이 일대에 전태일과 같은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켰던 청춘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다정한 노랫가락 한 소절에 마음을 위로하던, 거친 빵 한 조각을 씹으며 허기를 달래던 이들. 긴 세월에 밀려 그들은 어디쯤 어떠한 모습으로 있을지. 쓸쓸한 입맛을 다시니 조금 전 먹었던 고구마 식빵의 맛이 다시 올라온다. 돌이켜 보아도 특별한 맛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 기억 깊은 곳을 찌르는 익숙한 맛이 있다. 가요무대에서 울리는 그 음악처럼. 순수한 청년의 순정과도 같이 투박하지만 수수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맛이다. 그런 맛을 내는 빵집이다. 어느 순간 고향처럼 그곳을 다시 찾고 싶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omn.kr/24q1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