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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Sep 21. 2023

12.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의 전환(2)

논쟁의 재현을 통한 특수성의 이해

사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균형에 대한 논의는 현대의 다민족 국가, 다문화 사회에서 공통의 국가적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해 갈지, 혹은 그들의 특수성을 얼마만큼 인정할지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보편성은 자칫 ‘일반화’라는 이름으로 사회통제 및 구조폭력으로 언제든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세계시민으로서 공통으로 지닐 법한 ‘보편성을 강조’하는 현재의 세계시민교육은 이와 같은 보편성을 일종의 바탕 관념으로 가볍게 설정하고, 실제 세계시민성이 발현되는 것은 개별적인 특수상황, 


‘특수성(Particularity)’을 중심으로 진행됨을 인식하며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 같아요.


이러한 특수성은 서로 간의 이질성, 논쟁성을 재현해야만 합니다. 현실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는 결코 가치중립적이거나 보편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특수한 맥락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죠. 


마이클 샌델(Sandel) 교수는 “늘 새로운 상황이 생기고, 특정 상황에서 어떤 습관이 적절한지 알아야 한다. 실천적 지혜는 특정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실천하는 지혜이고, 실천은 특정 상황과 관련되기 때문이다”라 말하며 이러한 특수한 상황 속에 실천적 지혜가 연결됨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실례로 독일의 시민교육으로 1976년 합의 제정된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논쟁성의 재현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논쟁성의 재현’이란 교육공간 안에서 논의하는 모든 의제가 현실의 상이한 정치세력, 입장, 이해관계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처럼, 교육공간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고 비판적으로 논의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실천영역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참여자들 간의 논쟁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논쟁의 주제 또한 학생들의 관심이 가장 뜨거운 시기에 ‘학습의 최적 순간(teachable moments)’을 고려해 설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시의적 주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뜻이겠죠.


그러나 현재 한국의 세계시민교육 현장 안에서는 이와 같은 시의성 있는 주제의 선택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사항’이라든지, ‘학생들에게 오해의 소지를 만들 수 있다’라는 이유로 잘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현재의 공교육 안에서는 교사이건 학생이건 개별의 가치판단에 따른 언급을 무척 조심스러워하며 서로 ‘피해야만 하는 무엇’으로 인식하고 있죠. 또한 학습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갈등의 영역을 두려워하고, 또한 발생하더라도 서둘러 봉합하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러한 바탕 안에서는 학습적 논쟁이 진행될 수가 없습니다! 혹은 논의가 종결된 사안을 표면적으로만 다루거나,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일반화된 뻔한 형태의 OX형 질문만이 던져질 뿐이겠죠. 하지만 시민 덕성 중심으로의 세계시민교육을 위해서는 특수한 상황 안에서 기존의 어떠한 권위나 입장도 도전 및 반성 가능하며, 지속적인 재심의의 가능성 또한 열어 놓아야만 합니다. 


합의의 과정에 있어서 큰 이념적 차원의 충돌이 있을 때는 특정한 이념을 지배적 가치로 인정하기보다는 상충하는 다양한 이념들을 존중하며, 절차적 정의에 입각하여 이들 간에 합의점을 모색하는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가 필요해요. 중첩적 합의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의 극단적 의견은 자기, 또는 자기 집단의 입장과 권리만을 주장하거나, 반대로 하나의 공통된 가치를 강조하며 모두를 획일화하여 하나로 통제하며 그에 대해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죠. 전자의 경우는 공동의 목적, 공동의 가치, 연대와 책임 등은 불가능해지며, 후자의 경우에는 개인과 개별 집단의 특수성, 상이한 가치, 권리와 이익의 보장은 불가능해집니다. 참다운 시민성이 결국 개인(개별집단)과 사회(공동체)가 함께 번영하는 것을 지향한다면, 필연적으로 ‘개별 특수성’과 ‘공공성’의 두 핵심축을 함께 놓고 그 주요 쟁점과 조화의 방향을 고찰해야만 할 것이에요.


이상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일 마주하는 생활영역의 동일하고 보편적인 갈등과 문제일지라도 그 순간의 상황적 요인이 개입한 ‘특수 문제’라는 인식을 획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특수성은 사회적 특수성을 포함한 문제의 특수성을 함께 수렴하기도 합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매일 동일하지만 사실은 매번 새로운 문제와 맞닿고 있잖아요. 어제와 동일한 상황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미국의 교육학자, 존 듀이


이러한 가변성은 바로 미국의 교육학자 듀이(Dewey)가 언급한 '프래그머티즘(pragmatism)'과도 연결되기도 하는데요, 잠깐 설명을 드릴까 해요.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은 일반적으로 ‘실용주의’라고 번역되지만 이 해석은 듀이가 말하고자 하는 개념을 제한적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이름은 사실 매우 다양한 주장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이름이거든요. 그것은 변화를 강조하는 세계관, 실천적 진리관, 자연주의적 성향, 다양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등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를 담아 ‘실용주의’라는 번역어보다 원래의 뜻을 담아 프래그머티즘으로 표현하고자 해요.


프래그머티즘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관점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 프래그머티즘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과정과 변화로 보기 때문에 동일하게 불안정하며 불확실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둘째, 인간에 대해서는 세계와 마주하면서 상호작용하는 연속적인 과정에 있는 존재로 봅니다. 과정과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세계는 초경험적인 실재가 아니고 오히려 다원적이면서 자체의 과정 속에 목적을 내재하고 있는 현실 세계가 되며, 이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성질을 띠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개념으로 듀이는 공론장에서 발견되는 불일치의 가치에 대해 “반박을 통해 비로소 사태의 핵심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문제 되는 대상들을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서로 다르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생겨나는 그러한 차이가 드러난다. 사회적 문제들을 좀 더 많은 지식과 좀 더 많은 지혜를 통해 다루는 상태는 원래의 문제 상황을 일시에 개선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문제 상황에 지적으로 접근하는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개별의 불일치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역설에 대한 적극적 수용은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Mouffe)의 헤게모니 정치 이론과 맥을 같이 하기도 해서 연결하여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벨기에 출신의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


무페는 공론장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갈등을 하버마스의 논의처럼 ‘통일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이질성을 수용하고 오히려 당연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역동성(dynamics)이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이와 같은 역설과 긴장을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합리성(rationality)을 통해 은폐 혹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을 인정하고 오히려 노출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페는 시민의 자격을 개인적 지위로만 한정함으로써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닌, 집합적 권리를 인정하면서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간의 새로운 유형의 접합의 필요성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보편주의의 거부가 아니라 보편주의의 특수화를 의미합니다. 


다만 무페의 갈등에 대한 논의도 당연히 그 제한 영역이 존재합니다. 갈등 대상인 상대방을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적(enemy)’이 아닌 자신과 헤게모니 투쟁을 하는 일종의 ‘경쟁자(adversary)’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죠. 그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상호 구도를 중심으로 상대방을 인식할 때 이상의 존중은 일종의 동질성이나 최소한의 보편성으로도 인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존중’은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덕성임은 틀림없죠. 이것은 시민들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갖는 지속적으로 습관화된 어떤 정서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덕성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심의 과정인 ‘소통’을 통해 함양되고 강화됩니다. 이러한 덕성의 형성 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좋은 삶(eudaimonia)으로의 이행이며, 개인에게는 물론이고 공동체에도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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