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합을 위한 보편성 성립의 중요성
타자와의 만남은 장(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시민들은 다양한 공간 속에서 자신과는 다른 이들을 만나가며 생활하고 있죠. 학생들 또한 학습공간이라는 장 안에서 다수의 대상들을 만나며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함께 어울리는 장은 일종의 공적 영역(public realm)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Arendt)에 따르면, 이러한 장은 “여러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어떠한 폭력의 매개도, 어떠한 생물학적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공적 공간”을 뜻합니다. 이러한 공적 공간은 사회를 규정하는 사회적 규범을 의미 있게 만들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반응으로부터 학습하며, 타인이 인정하는 증언을 가짐으로써 사람들의 특정한 행위와 표현을 실재하게 만들죠.
또한 이와 같은 장소의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인간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장소와 인간, 사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장소 생성과 관계 맺음의 연관을 잘 보여주는 ‘사이(in-between)’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아렌트식의 장소는 이질적인 사람들이 만나 관계 맺음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이들의 여러 세계관이 중첩된 공간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겨나기 마련이죠. 그리고 그것을 조정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의견들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수정되며 때로는 확장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견 조정 과정은 동시에 관계 형성 과정이기도 하죠. 주고받는 다양한 대화와 의견은 서로의 정보와 인식들이 형성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삶의 태도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상호주관성 획득의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 맺음의 행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복합적인 관계와 의미가 생성되는 삶의 자리로 기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렌트가 논의를 풀어간 공공의 공간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기준으로 상정되어 있기에 지금과도 같이 복합적이며 다구도적인 현대적 상황을 그대로 대입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실제 도시국가였던 폴리스는 적은 구성원이 좁은 영토 안에 함께 살고 있었으며, 데모스의 자격 요건 때문이라도 서로 간의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이 컸기에 그들 가운데 공통사상이나 보편기준을 확립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웠죠.
그러나 지금과도 같이 세계화 과정을 통해 확장되는 시민성 앞에 국경을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의 정당성이나 충성심은 점차 약화되었고, 동일하게 세계화의 현상에 대응할 가치나 윤리 체계가 부족한 현실 속에서 시민적 정체성이란 국경이나 지역에 기반한 것이 아닌 인류보편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요청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의 과정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세계시민 안의 보편성(Generality) 확립에 대한 논의인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도 같이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나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전통에서 기원한 것처럼 세계시민주의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동등한 권리와 보편적 규범 및 가치를 존중하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동일한 맥락에서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Habermas)는 공론장 안의 다양한 계층이 모여 숙의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는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 과정’으로서의 세계시민상을 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진전을 위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과정(co mmunication)과 상호 교감(consensus)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죠. 교육적인 측면에서 하버마스는 “이성적 능력 개발이란 의사소통공동체 내에서의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를 통한 자아 발달을 의미하며, 진리 주장과 규범에 대한 합리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자율성과 사회 합리화를 위한 교육실천적 문제”라고 언급해 개개인 간의 소통 능력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교육을 통해 의사소통능력을 증진하여 대화적 합리성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실천적 담론이 연대성에 기초해 있고 또 실천적 담론을 통해 재생되는 상호주관적 관계는 서로 의사소통행위를 하는 구체적인 사람들 사이의 연대성에 의해 유지된다. 그렇기에 구체적인 생활 세계의 연대성의 망을 떠나서는 어떤 유의미한 실천적 담론을 기대할 수 없다”고도 말하였습니다.
정리하자면 그는 교육공동체 성원들 사이의 개방된 토론과 자유로운 참여를 통하여 제도화된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타당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회통합을 위한 보편합의를 강조한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세계시민주의는 보편주의 관점에서 인권과 도덕성 같은 기본 권리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인류애적 관점에서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기 때문에 인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통적인 정체성을 인식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세계시민의 보편적 핵심요소가 도출되었더라도 실상 세계시민교육으로 전환할 때 현실성을 가지고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에요. 개별의 국가는 특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적 현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시민교육 역시 일국의 특수성과 전지구적 보편성을 어떻게 고려하는가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국가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한 개인을 타문화, 타국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전지구적 공동의 문제에 대해 책임감 있는 세계시민으로 위치시키는 윤리적 보편성은 국민국가의 특수한 이해관계와 조화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보편화와 마찬가지로 특수화 또한 병렬 적인 목표로 함께 제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보편성을 강조하는 세계시민주의는 ‘통합’이라는 명명하에 자칫 서구 유럽 중심으로 다원적 가치들이 흡수될 수 있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죠. 세계시민주의 안에서 논의될 수 있는 공통성과 보편성 안에 특정 국가 및 민족적 권력이 작동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세계시민적 가치관과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주의해서 특수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챕터에서 좀 더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