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곡가들이 이름에 걸맞는 노래를 썼다.
이승환의 3집 앨범은 My Story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 사랑도, 믿음도, 그리고 미움도, 나에겐 그랬다.
90년대 노래엔 내레이션이 들어간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너에게', 넥스트의 'here I stand for you' 등 지금 들으면 오글거리는 것들이 당시엔 진정성의 표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난 첫 트랙 'My Story'를 통해 어른의 세계를 엿 본 기분이었다. 사랑, 믿음, 미움 모두 제대로 겪어본 적 없는 내게 체념의 기운이 느껴지는 내레이션은 좀 이상해도 멋진 시작이었다.
이어서 김광진이 쓴 '내게'가 나온다. 이후 내가 들은 수많은 한국형 발라드는 '내게'의 변주나 아류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유재하나 변진섭의 노래에서 그런 걸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난 그때 확실히 이승환의 내게를 들으며 몇십 년간 이어지는 한국형 발라드의 뿌리를 맛보았다. 작곡자 김광진은 이후 더 클래식과 솔로 활동을 통해 좋은 앨범을 많이 내놓았는데 2집 "My love my life"에는 록버전 '내게'가 나온다. 보컬이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이승환의 원곡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춘기 소년의 느낌이라면 김광진이 부른 버전은 이럴 수도 있으니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4번 트랙 '남자는? 여자는?'은 한때 유행했던 남녀의 주거니 받거니 노래인데 다른 무엇보다 '센 척해 보인다'는 가사가 정말 오랫동안 남았다. 한 번도 센척해 보인다는 문장을 써본 적 없는데 노래 가사로 가끔 나왔다. 저 표현을 쓰는 게 멋있는 건가. 하는 의문을 몇 년 동안 갖고 있었다. 한때 잠깐 유행했던 표현 같은데 지금도 센 척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이 노래가 자동으로 생각난다.
7번 트랙 '사랑에 관한 충고'는 공일오비의 정석원이 작사 작곡한 노래다. 지금 나왔다면 꼰대 가사로 평가받았을 것 같다. 공일오비의 훈계조 가사와 비슷한 뉘앙스다.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데 내가 진정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자면... 뭐 이런 식이다. (공일오비의 이런 가사의 최고봉은 '바보들의 세상'이 아닐까. 그래도 영악해 보이지는 않았지. 뭐.) 그런데 그때는 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정석원 특유의 듣기 좋은 멜로디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8번~10번 트랙은 이 앨범의 백미다.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모르겠다.
8번 트랙 '덩크슛'은 농구를 좋아하는 김광진이 쓴 곡으로 덩크슛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주문을 외워서 내 인생 한 번만이라도 덩크슛을 하고 싶다는 가사. 중간에 나오는 주문을 외워서 처음 노래방에 갔을 때 불렀던 기억이 난다. 가사가 특이해서 그럴까. 난 사람들과 친해져야 하는 자리에서 꼭 이 노래를 불렀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때, 회사 회식 때, 그리고... 군대 훈련 때 이동하는 차 안에서 불렀다. 완도의 어두운 포장도로를 보며 불렀던 덩크슛의 기억은 회색빛에 가깝지만 어떤 욕구, 김광진은 덩크슛을 하고 싶었고 난 그때 무척이나 집에 가고 싶었다는 것을 놓고 보면 뭔가 어울리는 노래였었다.
9번 트랙 'radio heaven'을 들으면 가사와는 별개로 즐겨 들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이승연, 고소영, 김현철, 이적 등 팟캐스트와 달리 한번 놓치면 다시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소중했었다. 난 항상 음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재미있는 수다가 있는 라디오가 훨씬 좋았다. 하지만 음악이 전혀 없으면 라디오가 아니기에 좋은 노래와 수다가 공존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늘 그립다.
10번 트랙 '화려하지 않은 고백'은 오태호의 작품이다. 오태호의 노래를 참 많이 들었다. 히트 발라드 작곡가 시절 그의 노래엔 생생한 사랑의 감정이 녹아있었다. 낯설면서 낯익은 그 노래들이 참 좋았고 지금도 오태호의 노래를 들으며 지나간 시간을 추억한다.
이승환 3집을 쓰면서 잘 썼다 못썼다를 떠나 참 즐거웠다. 할 이야기가 많은 앨범을 골라 글을 쓰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 중, 고 시절 들었던 앨범에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이승환 앨범을 이야기하는데 작곡가 이야기만 잔뜩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태호의 새로운 노래를 한번 더 이승환이 불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