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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books Dec 02. 2018

어린이들은 맑은 하늘을 그리워할까?

어차피 이제는 바깥에서 놀지 않는다.

1. 옛 기억 속 하늘


어린 시절의 우리의 기억은, 단편적인 기억들의 불완전한 조합으로 왜곡된 기억들로 둔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요하게 느꼈던 것들, 즉 지배적이고 보편적으로 느꼈던 어떤 분위기나 이미지는 크게 왜곡되지 않고 우리 머릿속에 아주 분명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오감으로 느꼈던 순간들의 기억들은 우리가 성인이 되고 늙어가는 동안 큰 왜곡된 편집 없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초등학생 때 뛰어놀았던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에서의 기억이 있다. 여러 종류의 놀거리들로 가득한 바로 그곳이다. 우리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아직은 학원이나 방과 후 활동 같은 것이 그리 적극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학교 수업이 끝나면 거의 대부분의 날은 이런 공간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었다. 

한껏 땀을 흘리며 놀고 나서 아주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을 때, 그제야 오늘 하늘이 어떤지 잠시라도 살펴보게 된다. 대부분의 날들이 맑았다. 특별히 비나 눈이 오지 않은 날의 날씨 상태는 그러했다. 실컷 뛰어놀았기 때문에 내가 들이쉬는 공기 또한 직접적이고 강렬한 감각으로 내 호흡기관에 인지된다. 

우리의 기억 속의 그 공기와 하늘의 촉각적, 후각적, 시각적 특성에서 특별히 이질적인 요소는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었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적어도 밖에서 뛰어노는 일에 있어서 날씨라는 환경적 요소 때문에 특별히 방해 받거나 불편한 일은 겪지 않았다. 바로 그 기억만큼은 2~30년 전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큰 왜곡이 없는 보편적인 기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공기의 질과 상관없이, 우리가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행동을 통제하는 가장 큰 요인은 언제나 부모님의 부름이었다. 부모님이 직접 우리가 놀고 있는 공간으로 찾아와서 저녁을 먹으러 오라는 얘기를 할 때도 있지만, 새나라의 훌륭한 어린이들 대부분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언제 어떻게 집에 들어가는 것이 저녁의 평화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인지를 체득했다.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혹은 '배꼽시계'를 통해서, 아니면 적당히 시간이 오래되었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내리고서는 아쉬움을 가득 안고 친구와 작별인사를 한 후 집으로 터벅터벅 들어오곤 했던 것이다.   



 2. 오늘날의 경우


어찌보면 요즘의 아이들이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학원, 학원에서 집으로 오는 도보 동선의 최적화 속에서 이 악몽 같은 미세먼지의 영향을 덜 받는 것이 차라리 축복일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차로 한 공간에서 한 공간으로 지체없이 바로 이동한다. 어차피 하늘을 볼 시간은 많지 않다. 모든 하루 일과가 끝난 후 마주할 수 있는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이후의 모습이다. 미세먼지로 인해 뿌옇게 변한 하늘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제대로 관찰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후각으로 경험할 수는 있다. 바로 그 탁한 먼지 내음 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진중히 경험할 시간은 없다.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얼른 차에 올라 집으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어린이들이 미세먼지로부터 상당히 차단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평일 하교 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나마 피할 수 있는 것이지, 사실 우리 모든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이 어린이들도 알게모르게 대한민국에서의 일반적인 하늘과 공기가 가져다주는 느낌이란 것이 무언인지에 대한 보편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주말에 어린이들도 부모님과 함께 공원에 나가거나, 산천 곳곳에 나가 여유로움을 만끽할 그 순간순간들의 누적을 통해 말이다. 

편서풍, 중국발 산업폐기물, 황사, 디젤 가스, 고등어구이(?) 등 뭐든간에 그 미세먼지를 일으키는 악마적인 요인들은 직장인들과 우리 어른들, 어린이들의 바쁜 일과에 맞추어 평일에 그 위력을 특별히 더하고 주말에는 같이 쉬는, 합리적이고 사리분별이 가능한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때는 야속하게도 평일에 잠시나마 공기질이 좋았다가도 주말만 되면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모처럼 공원과 자연으로 나온 행복한 가정들의 일상을 망쳐놓기 일쑤이다. 우리 같은 직장인들은 그래서 평일에는 사무실에서 직장 상사들과 후배들과 싸우고, 주말에는 대자연의 위대한 복수의 칼날에 맞서 싸우는 형국 속에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어린이들은 과연 어떨까. 

그들은, 맑은 하늘이 주는 감사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비교군적 경험조차 거의 부재한 존재들이다. 어렸을 적 놀이터에서 바라본 그 푸른 하늘, 그리고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뒷동산에서 멀리 바라본 서울의 전경 같은 것이 기억 속에 별로 없을 존재들이다. 그렇게 된 것에는, 어른들 만큼 바쁜 일과 때문에 맘 놓고 야외에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뛰어다니면서 거칠게 맑은 공기를 들이마실 여유가 사라진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그럴 수 있는 시간을 만끽할 주말 같은 때에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미세먼지의 공습으로 부모님이 걱정스레 씌워주시는 마스크를 통해 답답한 공기를 들이마실 때가 더욱 빈번해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21세기의 어린이들에게는 역시나 첨단 테크놀로지가 어울린다. 연트럴파크 같은 곳에 마음껏 못 나간다면, 유튜브나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체험(VR/AR) 기기 등을 통해 영상 콘텐츠를 통해 간접 경험하면 될 일이다. 공기청정기가 있는(참고로 나도 올해에는 좋은 기기로 하나 구입했다) 안전하고 신선한 집 안에서 가상의 공간을 구동하고 마음껏 뛰어놀며 노는 것이, 이 어린이들이 3~40년 후 폐암이나 각종 호흡기 관련 질환으로 사망하게 될 확률을 줄이는 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보험회사, 혹은 주식 관련 직종 종사자라면 이 부분 관련주나 금융상품을 주시해 보자).

어린이들에게 굳이 미학적/창의적 사고를 진작시키기 위해, 미술 시간에 하늘색을 정말로 '하늘색'으로 그리는 어린이들을 두고 "하늘이라고 반드시 하늘색이나 파란색으로 그리지 않아도 된단다" 같은 지도를 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이제 그런 하늘만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이 짙은 회색으로 역사/사회 교과서에서나 봤던 런던 스모그 현상 같은 하늘을 묘사했다면 차라리 사실주의적 표현(조금 유식한 선생님이라면 17, 18세기 북유럽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아이들을 칭찬해주자)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평가해줘야 하는 시대이다. 오히려 전형적인 파란색으로 하늘을 그리는 학생을 두고 "너는 피카소나 르네 마그리트에 가깝게 그렸구나!" 라는 평가를 해주자(조금 아는 체 한다고 이런 식의 그림을 두고 '인상주의자와 같다'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건 너무나 틀린 평가이다). 

만약 아이들이 미술시간에 짙은 회색이나 갈색 계열의 색상을 그라데이션 효과로 하늘을 그리고, 가운데 배경에는 마스크를 쓰고 길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침울한 표정의 엄마와 아빠와 자신, 그리고 헥헥대는 반려견 '뽀삐'를, 그림 한켠에 눈이나 피부가 따가워서 약국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면 어떤 평가를 내어줘야 할까. 만약 그 학급 선생님이 사실주의적 표현의 관점에서 학생들에게 점수평가를 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온전한 양심에 비추어 과감히 90점 이상의 점수를 부여하자. 그 어린이는 최소한 최적화된 자신의 일과 동선 속에서, 예리한 눈과 어린이다운 기민한 감각으로 하늘과 공기 그리고 길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한 정직한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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