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이우정, 2020
아무도 없는 기차 안 잿빛 조명 아래서 자고 있는 강이의 모습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관객과 같은 위치에서 자신의 자는 모습을 보고 있는 듯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 때는 몰랐다’고 말하는 강이의 내레이션은, 영화가 명백하게 과거의 이야기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동시에 그 때의 최선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음을 암시한다. 곧 다큐멘터리 자료화면 같은 2000년대 초반의 영상이 등장하고 ‘최선’에 대한 아주 긴 변명이 시작된다.
친한 친구 사이인 강이와 소영, 아람은 가출을 감행한다.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소영은 어쩐지 늘 지루한 표정을 짓고, 아람은 불쌍한 것들에 지나치게 감정을 쏟는다. 강이는 그런 친구들에게 휩쓸리는 듯 아슬아슬한 저울 위에서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강이가 애써 외면한 사실을 들춰보면 추는 늘 소영 가까이에 있었다. 두 사람이 비춰진 거울에서 강이는 자신이 아닌 소영을 보고, 늘 한 박자 늦게 그의 감정을 복사한다. 동경과 사랑이 얽힌 강이의 눈은 소영이 정말 슈퍼 모델이 된 후 배우의 길을 걷게 될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환상은 쉽게 부서지고 더러운 현실이 시야를 파고든다. 한 덩어리로 뭉쳐있던 우리, 함께라면 언제든 현실을 탈출할 수 있었던 우리는 이제 집을 나간 병신이 되었다. 소영은 술집에서 일하는 아람도 혼란 속에서 키스를 한 강이도 다 더럽다. 왜, 어디로 향하는지 조차 모른 채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일탈은 우정의 종말을 부른다.
강이는 창문을 치우라는 소영의 말에 돌을 던져 가로등을 깬다. 자꾸만 어둠으로 파고들려는 소영을 강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강이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게 최선이었기에 무엇이 최악인지 알 수 없었다. 늘 ‘우리’라는 말로 눙쳐져 있었기에 우정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영화 내내 세 사람은 자주 낮은 곳에 주저앉아 있거나 어딘가에 기대어 불안정하게 서 있었다. 거리에서 받은 상처로 부식된 우정 안쪽에는 강이가 소영과 아람을 이어주고 있었음이 훤히 드러난다. 소영을 위해서라면 창문을 치울 수도 있었던 강이는 이제 무능한 아이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강이는 여전히 높은 오르막의 집에 살고 자신을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는 마찬가지지만 소영이 벌려놓은 거리감은 당혹스럽다. 예쁘고, 성적이 좋고, 좋은 동네에 사는 소영은 자신이 불행했던 시간이 친구들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강이의 희망을, 소영은 폭력으로 짓밟는다. 강이는 유일하게 곁에 남은 아람을 따라 다시 한 번 가출을 감행하지만, 마주한 것은 불쾌한 술집 손님들과 텔레비전 화면 속 미래를 꿈꾸며 수능을 보는 학생들의 뉴스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눈앞까지 닥친 어둠이 보인다.
영화가 익숙한 듯 낯선 성장 영화로 읽히는 까닭은 방민아 배우가 연기한 강이의 텅 빈 표정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혼란을 촘촘히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세 사람의 우정은 끊임없이 위태롭고 나약하며 잘못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러나 명확한 어느 지점을 꼽아 여기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없다. 그 때의 모든 선택은 그들에게 최선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애써 지연시킨 어둠은 끝끝내 도래할 터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 초반 등장했던 질감의 화면이 다시 등장한다. 모든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나 있었다. 영화는 잔인했던 최선에 대한 아주 긴 변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