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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 Mar 19. 2022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일 때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2005)

 책의  문장을 모아 놓은 인터넷 게시물을 보신 적이 있을까요.


 어쩐지 저는   주기로  글을 보게 됩니다. 콘텐츠의 내용이 그리 달라진 것도 없는데 끊임없이 누군가에 의해 끌어 올려지는 현상이 한국인의 뒷북 혐오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명문장이라 그런 걸까요, 아니면 모두가 책과 한참 떨어진 삶에 익숙해져 새롭게 느끼는 걸까요. 어떤 작가는  문장을 비워놓고 소설을 시작한 다음 집필을 끝낸 뒤에  문장을 적는다고 합니다.  문장 떼기를 어려워 하는 이들도 많고요. 그만큼 작품의  인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사실  문장이 기억나는 소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보다 소설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하는, 현실의 나를 소설로 끌어들이게 하는 문장을 기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영화도 그렇습니다. 어떤 장면으로 시작되는지 보다 자신에게  닿은 장면을 기억하기 마련입니다.  장면이 강렬한 것도 있는 한편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것도 있습니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후자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사실 강렬함이라곤 찾아볼  없는 미적지근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주제가 ‘평범함이니까요.​

 거북이에게 밥을 주는 일에서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있는 사람인 스즈메는 23살의 가정주부입니다. 외국 출장을  남편과의 통화 내용은 거북이에게 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것뿐이지만 스즈메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남편에 대해, 무료한 일상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시무룩한 얼굴을 지어 보이고는 ‘,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하고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할 뿐이죠.​

 스즈메는 우연히 계단 구석에서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스파이 모집 공고를 발견합니다. 그녀는 의심  호기심 반으로 모집 공고를 내건 이들을 찾아갑니다. 자신들이 ‘어느 나라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구기타니 부부는 스즈메처럼 평범한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이 찾던 스파이에 제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스즈메에게 주어진 미션은 다름아닌 스파이라는 사실을 잊은  평범하게 잠복하는 . 얼떨결에 활동자금 500만엔을 손에 쥐게  스즈메는 스파이 교육을 받으며 평범한  살아가던 자신 주위의 스파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맛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어중간한 맛의 라멘만을 끓이던 라멘집 사장과 사실은 미장원이지만 이발소인  보이는 가게의 주인 모두 어중간한  살아가는 스파이였던 것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기 어려운,  그런 판단 자체가 의미없다고 쉽게 단정지을 법한  애매함이 스파이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스스로를 '스파이'라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일상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선글라스를 사는 것도, 음식점에서 메뉴를 고르는 것도,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까지도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수많은 고민을 거쳐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평범한 걸까요? 언제부터, 그리고  스즈메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으로 인식했을까요?

스즈메의 가장 친한 친구 쿠자쿠는 '공작(クジャク)'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스즈메는 '참새(スズメ)'라는 뜻입니다. 쿠자쿠는 이름처럼 강력한 존재감을 가집니다. 자유분방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는  스즈메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스즈메가 북풍 소리가 나는 선풍기를 발명해 1200만원을 벌었을  쿠자쿠는 경마로 2000만원을 따는 식이었지요. 그저그런 남자친구와 결혼한 스즈메와 달리 쿠자쿠는 언젠가 에펠탑이 보이는 멘션에서 프랑스 남자와 살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동굴에서 독신 생활을 이어갑니다. 쿠자쿠의 그늘 아래서 옅은 존재감을 느끼던 스즈메는 자신이 정말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스파이 부부는 사회의 여러 뒷모습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에도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스파이들부터가 바로 그런 존재이니까요.

스즈메는 누구를 구하러 가는 걸까요?

 스즈메가  영화의 주인공이자 스파이로 발탁될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쿠자쿠처럼 눈에 띄는 사람은 스파이가   없습니다. 슈퍼 히어로인 클라크 켄트도, 피터 파커도 현실에서는 스쳐지나갈 것만 같은 이들입니다. 그렇게 평범한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을 지켜나갑니다. 비장의 무기를 숨긴 채로 말이지요. 히어로물의 서사처럼, 스즈메는 작고 귀여운 사건들을 겪어가며 스스로의 특별함을 찾아내고  만들어갑니다.​


스즈메 주변 인물들의 정체가 차례로 밝혀졌을 때 그들이 사실은 스파이였음을 알고 나니 우습게도 영화 초반에 보여졌던 모습들이 역시 미심쩍었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저 사람, 사실은 엄청난 비밀을 가진 사람이야!'라는 인식이 생기고 나면 어떤 모습도 눈에 띄게 됩니다. 사실 저는 주변인들의 특징을 뚜렷하게 인식합니다. 각자가 어찌나 이렇게 다르고 특별한지. 특히나 단단한 취향이나 습관을 만날 때면 무척 즐겁습니다. 정작 최근 저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고민하지 않고 살 정도로 흐릿해져가고 있지만요. 시야마저 흐릿해져 제 특별함을 충분히 닦고 가꿔주지 못하는 게 되는 것은 아닐까, 좋아한다는 감정을 잃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두렵기도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다만 스스로 주문을 외워봅니다. '그래도 나에게는 엄청난 비밀이 있다!' 하고요.




+ 영화 덕분에 두 가지 재미있는 발견이 있었습니다. 첫 문단을 쓰면서 <소설의 첫 문장>이라는 책과 만났는데, 소설과 삶의 시작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참고로 부제는 <다시 사는 삶에 대하여> 입니다. 240권이나 되는 소설의 첫 문장이 모여있어 개중에 제가 기억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찾아보는 일도 흥미로웠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소설의 첫 문장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네요. 두 번째는 이발소와 미장원의 차이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요, 영업장에서 사용하는 의자에서부터 운영자의 자격 조건까지 꽤 다르더라고요. 이 차이도 누군가에게는 미래가 걸린 엄청난 결정을 해야하는 문제겠지요? 보이지 않던 일상의 뒷모습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보람되고 진지한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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