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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 Mar 23. 2022

이토록 안온한 코미디라면

<애비규환> 최하나, 2020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정수정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토일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등학생 효훈의 과외 선생인 토일은 정철의 속미인곡을 읊다 임금님한테 하는 말 치고는 이상하다며, 사랑인데도 충직으로 해석하는 유교의 폐해라고 열변을 토한다. 그런 토일에게 선생님 같은 사람이 임금님이면 그런 시를 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효훈. 순간 묘한 기류가 흐르고 두 사람은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다. 눈 깜짝할 새 5개월이 지나 배가 불뚝 솟은 토일은 자신의 부모에게 임신 사실을 밝히고 자신의 친아버지를 찾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코미디 영화에게 보내는 웃음은 문화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에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호흡하는 주제를 다룬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 점에 있어서 〈애비규환〉은 적절한시기에 터져 나온 훌륭한 가족 코미디 영화다. 토일이네 가족은 일명 ‘정상가족’에서 벗어난 형태임에도 매우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들은 서로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논리적인 토론을 펼쳐 상대를 설득하는 문화가 자리 잡혀 있다. 토일이 ‘향후 5개년 계획’을 준비해 온 것도, 이러한 문화에서 자라왔기에 가능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영화의 영제인 〈More than Family〉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사회가 규정한 정상 가족의 테두리는 공허할 뿐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삶이다. 그렇게 토일이 당차고, 자신감 있고 행동하는 여성으로 자라났다는 안도감은 결혼식 직전 토일과 선명이 마주보며 긍정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엔딩과 만족스러운 합을 이룬다. 결국 이 모든 로드 무비는 임신과 결혼, 출산이라는 삶의 사건들을 앞둔 주인공 토일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미래로 도약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기세 좋은 여성 캐릭터들과 순한 남성 캐릭터들의 등장도 무척 흥미롭다. 제목을 통해 상상했던 것과 달리 영화는 토일과 선명을 겹쳐보고 또 달리 보도록 만든다. 남성 캐릭터들은 여성 캐릭터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다. 선명은 토일에게 과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줄 알았지만 살아보니 그렇지 않았고, 그러나 완벽하지 않아도 인생은 살만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주도권을 쥔 여성이 두려움없이 세상과 부딪히고, 그러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툭 응원과 위로를 건넨다. 그렇게 이어진 용기가 토일로 하여금 결혼을 행복과 불행을 가로 짓는 일생일대의 선택이기보다, 그저 망해도 괜찮은 개인의 선택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신이 누구를 닮아 이러는 지 궁금하다는 토일에게 외조모는 닮고 싶은 사람을 닮으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지난한 유교 유니버스의 사슬이 툭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낀다. 영화를 통해 가장 크게 느끼는 바가 여기 함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토일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친아빠 환규와 마주해 자신이 그와 무모한 것 하나만을 닮았을 뿐, 나머지는 안 닮겠다고 외치는 장면은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토일의 삶은 토일의 선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씩씩하게 딛고 일어설 것이다. 그렇기에 토일의 결혼도, 출산도 걱정스럽기보다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일 테다.


 포스터 사진을 살펴보면 배드민턴 라켓을 꽉 쥐고 선 정수정 배우의 왼발에서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라는 태그라인이 뻗어 나온다. 사자성어가 난무하는 부녀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듯한 ‘위풍당당 토일이의 낙장불입 마이웨이’라는 카피도 영화가 가진 개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호연지기 토크’,’승승장구 토크’등의 GV 타이틀에서도 센스가 느껴진다. 영화는 개봉 6일만에 2만 관객을 돌파했다. 무엇보다 정수정 배우의 첫 스크린 데뷔작이라는 타이틀과 그녀가 임산부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설정이 2030 여성들의 표를 얻을 수 있게 한 요인으로 보인다. 데뷔작으로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정 배우의 인터뷰와 더불어 최하나 감독과의 케미가 주목을 받았고, 장르적인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영리하게 이슈를 정면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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