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진지하게 미쳐본다는 것

이재문 <식스팩, 2020> _ 동아리는 동아리답게

by Skyblue

1. 공부가 아닌 다른 것에 진지하게 미쳐보기

슬램덩크 1권 중 채소연의 대화


“농구 좋아하세요?”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 방과 후 집에 돌아와서 무심코 텔레비전을 켰는데 빨간 머리에 키가 멀찌감치 큰 남고생과 예쁘장한 단발 머리 여고생이 나와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 거지. 1990년대 한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의 중고딩들을 농구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만화, 슬램덩크와의 첫 만남이었어.

주먹 하나로 일대를 평정하는 무시무시함을 가진 남자 주인공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었어. 지금껏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줄곧 차여왔다는 거야. 중학교 3년 내내 50명이나 되는 여자아이에게 말야 대단하지?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농구부의 남자 아이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또 퇴짜를 맞고 말아. 농구라면 학을 떼며 노발대발 했지. 그런데 엄청나게 예쁘장한 여자애가 말을 걸어오는 거야. 농구 좋아하냐고, 키가 멀치감치 크고 팔다리의 근육도 야무지게 자리잡고 있으니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던 것 같아. 그 남자애는 어떻게 됐냐고? 농구가 그저 구슬치기나 공놀이로만 생각했으니 뭘 알았겠어. 하지만 여자아이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남자아이는 여자 아이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 마음을 얻어보겠다고 농구부에 들어가게 된 거야.

처음에는 그저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멋진 모습만 보여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농구라는 녀석 하나에서 열까지 익혀야할 게 만만치가 않았어. 갑자기 남자 아이는 현자의 시간에 빠져들게 돼. 도대체 왜 내가 왜 농구란 걸 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된 거지. 그런데 너무도 재미있는 건 얼떨결에 시작했던 그 농구에 남자 아이는 천부적인 신체조건과 소질을 지니고 있었던 거야. 더 이상 여자 아이가 어떻든 상관 없이 농구를 좋아하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버린 남자 아이는 농구 선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지. 너무 뻔한 스토리인가? 31권이나 되는 방대한 이야기를 짧게 소개하려다보니 그 감동을 다 전하지 못함에 아쉬움이 남아.

계기가 어찌되었든, 자신이 미쳐볼 무언가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재능과 꿈을 발견해가는 것, 너무 감격적이지 않니? 요새는 아이고 어른이고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하는 것에 분주하다보니 목적없이 순수하게 무언가에 미쳐보는 일이 드문 거 같아. 뭔가 마음에 끌려 해보려고 해도 “야, 그런 걸 해서 뭐하게?” 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하면서도 위축되어 있거나 하고 있으면서 감추게 되고 말이야. 혹시 너희들에게도 드러내기는 뭐하지만 진지하게 미치고 싶은 혹은 미쳐있는 무언가가 있니?


2. 소설 <식스팩> _ 무언가에 미쳐있거나, 미치게 되거나


미래고등학교 2학년 강대한. 고등학교에 유일무이한 리코더부 회장 겸 회원. 며칠 전까지만 해도 회원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고딩이라는 배지를 달고 리코더를 부는 것에 쪽팔림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 회원이 뛰쳐나가는 바람에 회장 이외의 회원은 제로. 폭풍 성장세의 철인스포츠부에게 동아리실을 빼앗길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기적과도 같이 한 명의 1학년 회원을 포섭하는데 성공. 그럼에도 동아리실을 철인스포츠부와 같이 서야한다는 날벼락과도 같은 사실에 철인3종 승부에서 이기는 쪽이 동아리실을 차지한다는 승부에 동의하고 마는데, 그 결과 새벽에는 식스팩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고 방과후에는 후배들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다고. 그러던 중 의도치 않게 여자 아이 한 명도 입부 신청을 하게 되어 마음이 이모저모로 심란한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데, 누구든 리코더를 모욕하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자타공인 리코디스트 꿈나무.

미래고등학교 2학년 최정빈. 철인스포츠부 동아리 회장. 중학교때까지 뚱보에다가 놀림을 받기 일수였으나, 운동삼아 시작한 철인스포츠에 의외의 소질을 발견하게 되고 작년 교내 철인3종 경기에서 3학년을 재치고 1학년의 신분으로 1등을 거머쥔 신화를 이루어낸 자. 동아리 회원 증가로 리코더부 동아리실을 사용하기로 약속이 되었는데, 교실을 나누어쓰라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뿌리치고자 리코더 부 회장에게 철인3종경기 승부로 동아리실을 누가 차지할지 정하자는 치사한 제안을 한다. 사실 알고보면 운동보다는 꽃꽂이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고딩.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꽃꽂이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한 엄마와의 거래였다는 후문이 있다.

미래고등학교 1학년 김제혁. 중학교 3년 내내 괴롭힘에 시달려 몸과 마음이 망가진 소년. 고등학교에서도 동아리를 들려고 했지만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아서 맴돌던 중 적극 회원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던 강대한의 연주에 홀려 덜컥 리코더부에 합류. 리코더의 기초도 제대로 몰라 배우기가 녹록지 않았으나 금세 실력이 늘기 시작하고 교내는 물론 교외 대회에서 대상을 휩쓸면서 강대한을 제치고 교내 리코더 스타로 등극한다. 강대한이 고3이 되면서 동아리 회장을 맡게 되고 그의 연주에 홀려 가입한 회원수만 이제 열 댓명이 넘어 리코더부 부흥의 주역이 된다.

미래고등학교 1학년 장윤서. 무엇을 좋아한 적은 없지만 누군가를 제대로 좋아해본 적은 있다. 철인스포츠부의 최정빈을 짝사랑해서 철인스포츠부에 가입하려 했지만,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동아리실을 같이 쓴다는 리코더부로 노선을 변경한다. 애초에 목적이 불순했으니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거니와 실력도 그닥 출중하지는 않았으나 다만 대한이의 마음을 크게 설레게 하는 히로인으로 등극.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동아리에 들어온 만큼 불순한 행각을 일삼던 끝에 최정빈과 열애에 성공하지만, 그 즈음에 대한이의 갑작스런 고백을 받았다고.


3. 나의 억울한 학창시절 돌리도


https://blog.naver.com/topbraingy/221429002518


‘운명’이라는 말까지 구차하게 꺼내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연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만나는 일도 어마어마한 일이더라. 무언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해 본적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 해 본적 많거든. 너무 좋아서 그것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겠고 더 잘하고 싶어서 미치겠고 그런 거 말야. 그런데 그 무언가 미칠만한 것을 가져야겠다고 마음 먹는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더라.

<식스팩>에 나오는 네 명의 주인공들도 각자가 좋아하는 무언가와 만나는 사연들이 드라마틱하잖아.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같아서 행복하지만 주변에서 그걸 가지고 놀리거나 해서 고민인 친구도 있고,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달라서 좋아하는 것을 은밀하게 감추고 사는 친구도 있고, 자신이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다가 얼떨결에 만나 물 만난 고기마냥 날아다니는 경우도 있고, 애초에 무언가를 열심히 몰입해서 하는 것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던 친구도 있지. 이 네 명의 주인공 중에 너희들은 어디쯤에 속하는 거 같니?

책을 읽는 내내 영혼 없던 고등학교 시절이 불쑥 불쑥 소환되어 억울하고 또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 나같은 경우에는 고등학교 때 대학 진학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거든. 그렇다고 또 수능 성적이 엄청 잘 나와서 대학에 잘 간 것도 아니면서 그냥 고등학교 시기는 다른 것 생각말고 대학에만 잘 가는 것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팽배했던 것 같아. 아니면 다른 친구들은 나름 자기만의 무언가를 알아가고 미쳐가는 사이에 나는 그저 어떤 대학에 갈지 두려움에 떨며 너무나도 재미도 없는 고딩 시절을 보낸 것인지도 모르지. 후회가 막심하게 밀려와. 이건 비밀인데 나 고등학교 때 수학 공부 동아리였어. 너무 최악인가?

고등학생이라는 시기가 주는 매력도 한 몫하는 것 같지? 솔직히 초등학교 때는 아직 아이라는 딱지를 마저 벗어나지 못한 감이 없진 않으니까. 중학교 때는 반항하느라 정신 없고, 그 때는 무언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 그냥 어른들이 하는 말은 다 고깝게 듣고, 친구들끼리 의미없이 희희덕거림에 취해있었거든. 고등학생이 되면 나름 폭넓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독립하고 있을 때라서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진지하게 그리고 제대로 미쳐볼 수 있는 적기인 것 같아. 그리고 동아리라는 것을 통해 함께 미쳐볼 수 있는 동반자를 만나게 되는 것도 또 하나의 매력이지. 물론, 이상한 선배를 만나면 그것도 말짱 도루묵이 되지만 말야.


4. 동아리는 동아리답게


https://blog.naver.com/momthinking/222026006379


요새 고등학생 너희들은 어떨까? 동아리, 재미나게 하고 있니? 대학 진학이나 이런 거 고민하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그 무언가에 본능적으로 끌려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그 경험 만끽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고등학생들이 어떤 마음으로 동아리에 참여하고 있는지, 정말 동아리 활동으로 숨통이 트이고 자아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여유를 가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서 나름대로 이거저거 검색도 해보고 그랬는데 조금 우울한 기사들이 많더라.



중·고교 ‘동아리 가입 전쟁’ 백태

‘생기부에 한 줄’ 넣으려고…<신동아 2019-05-05>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715162/1



학종(학생부 종합 전형)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것은 아닌데 대학에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입시 전형 중의 하나로 학생 시기에 활동했던 교과 및 비교과 영역의 활동으로 입시의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절차더라고. 그리고 학종의 비교과 영역 활동에 '동아리 활동'이 너무도 중요해서 좋은 대학에 잘 들어가게 해 주는 특정 동아리 경쟁률이 만만치가 않다는 거야. 심지어 동아리에 들어가기 위해 자소서에 면접에 무슨 지필 시험까지 치룬다는 말에 혀를 내두르겠더라.

대학의 입시 부담이 점차 가중되면서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보내느냐에 따라 대학의 간판이 결정되고 대학의 간판으로 그 이후의 인생 경로가 크게 달라질 것을 생각하면 동아리까지도 전략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오히려 초등학교나 중학교 이른 시기에 이미 자신의 재능과 꿈에 대한 고민을 마무리짓고 고등학교에서는 전략적으로 그 꿈을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경로를 탐색하고 밟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피튀기는 동아리 가입 경쟁도 필수불가결하다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어째 너희들이 가기를 원한다는 길들이 다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다르고 너희들 각자가 가진 재능과 소질이 천차만별일텐데 너나 할 거 없이 가고 싶어하는 동아리가 겹친다는 게 말이야. 혹시 미리 결정해 두었다는 꿈과 장래희망이 누구나 한번 쯤은 생각해 볼만한 그런 직업군은 아닌지. 그래서 특정 대학 특정 전공에 지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모두가 비슷한 동아리 활동을 전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동아리만큼은 동아리답게 했으면 좋겠다. 입시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너희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냥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아주 작은 호기심만으로 시작하고 부딪쳐 볼 수 있는 것이 동아리가 되었으면 좋겠어. 전혀 공부나 입시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하고 금방 때려쳐 버릴 소모적인 활동이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련의 선택과 만남과 경험과 충격 속에서 그동안 전혀 알 수 없었던 새로운 '나'를 마주하는 기적적인 순간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게 결코 계획한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 예기치 못한 숱한 사건들이 개입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들로 수습하는 과정 중에 우연이 또 다른 우연을 부르고 그것이 운명이 되어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단 말이야. 내 손 안에 쥐어진 계획만 들여다봐서는 결코 알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지.

숨구멍이 필요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자아가 숨쉴 수 있는 숨구멍이. 그것은 지금 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관련 없는 혹은 그저 마음이 시키는대로 본능에 끌려 하게 되는 그 무언가에 달려있는지도 몰라. 인생을 단정짓기에 너무 이른 너희들의 시간을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두지 않았으면 해. <식스팩> 속 주인공들처럼 내가 원하는 무언가에 어떻게서든 미쳐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고 용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으며 글을 마칠게.